아일랜드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포일란은 고국에서 수도승이 되었고, 630년경 자기 형제인 성 푸르세오(Furseus, 1월 16일)와 성 울탄(Ultan, 5월 2일)과 함께 영국 잉글랜드(England) 동남부에 있던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 왕국으로 갔다. 시게베르트(Sigeberht) 왕은 그들을 환대하며 오늘날 노퍽주(Norfolk州) 해안가의 그레이트야머스(Great Yarmouth) 부근으로 추정되는 크노베르스버그(Cnobheresburg)의 고대 요새를 제공해주었다. 성 푸르세오는 그곳의 버그 성(Burgh Castle)에 영국 남부 최초의 아일랜드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은수 생활을 원했던 성 푸르세오는 동생인 성 포일란에게 수도원을 맡기고 성 울탄과 함께 고적한 곳으로 떠나 살다가 갈리아 지방으로 갔다. 그런데 머시아(Mercia) 왕국과의 전쟁으로 시게베르트 왕이 사망하고, 머시아의 펜다(Penda) 왕과 이스트앵글리아의 안나(Anna)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안나 왕이 도망가고 크노베르스버그마저 머시아에게 점령되면서 수도원의 약탈과 파괴를 막을 수 없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성 포일란은 651년경 동료 수도승들과 함께 배를 타고 성 푸르세오의 무덤이 있는 프랑크 왕국 서쪽 네우스트리아(Neustria)의 페론(Peronne)으로 갔다. 그곳에서 클로비스 2세(Clovis II) 왕의 환대를 받은 그는 얼마 후에 동료들과 함께 페론을 떠나 오늘날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 남쪽에 있는 니벨레스(Nivelles)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왕국의 살림을 책임지는 궁전장인 란덴(Landen)의 복자 페핀(Pepin the Elder, 2월 21일)의 아내인 성녀 이타(Itta, 5월 8일)가 640년 남편이 선종한 후 설립한 성 베네딕토회 수녀원이 있었고, 그녀의 막내딸인 성녀 제르트루다(Gertrudis, 3월 17일)가 초대 수녀원장을 맡고 있었다. 성녀 이타는 성 포일란에게 니벨레스 근처 나무르(Namur) 서쪽의 땅을 제공했고, 성 포일란은 그곳 포스라빌(Fosses-la-Ville)에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짓고 수도원장이 되었다. 성 포일란은 훌륭한 스승으로서 니벨레스의 수녀원과 포스의 수도원 모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사이의 브라반트(Brabant)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655년 10월에 성 포일란은 니벨레스의 성녀 제르트루다를 방문하여 생캉탱(Saint-Quentin)의 성 퀸시노(Quintinus, 10월 31일)를 기념하는 밤샘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고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설립한 다른 수도원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가 니벨레스 남서쪽 스네프(Seneffe) 숲에서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강도들이 그들의 시신을 숨기는 바람에 뒤늦게 발견하여 포스의 수도원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성 포일란이 죽은 후 성 울탄이 포스 수도원의 원장직을 이어받았다. 성 포일란은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던 중 살해되었기 때문에 벨기에의 여러 곳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기도 했다. 일부 지역 전례력에는 성 포일란의 신분이 주교로 나온다. 그가 로마(Roma)를 여행하는 동안 교황 성 마르티노 1세(Martinus I, 4월 13일)에 의해 지역 주교로 축성되었다고 하나 역사적 기록이 부족해 확인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아일랜드 전통대로 수도원장이자 선교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31일 목록에 아일랜드 출신의 사제이자 수도원장인 성 포일란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그러면서 성 푸르세오의 형제이자 동반자인 성 포일란이 아일랜드 수도원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남녀 수도원을 포스와 니벨레스에 세우고 한 곳에 이어 다른 곳을 방문하던 중 도적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포일란은 성 포일라누스(Foillanus, 또는 포일라노)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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