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플로리아누스(Florianus, 또는 플로리아노)는 250년경 로마 제국의 고대도시인 아일리움 켄티움(Aelium Cetium, 오늘날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장크트푈텐[Sankt Polte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한 후 군대에 들어가 로마 제국의 속주인 노리쿰(Noricum,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대부분과 슬로베니아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교가 되었다. 8세기 말 또는 9세기 초에 기록된 순교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로마에서 파견된 집정관 아퀼리누스(Aquilinus)는 대규모의 로마군이 주둔한 요새가 있었던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린츠(Linz) 근처 엔스 강(Enns R.)과 접한 라우리아쿰(Lauriacum, 오늘날 린츠 인근 도시인 엔스 교외의 로르흐)으로 와서 40명의 그리스도인을 체포했다. 다른 그리스도인을 색출하기 위해 모진 고문이 자행되는 동안 성 플로리아노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용감하게 집정관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였다. 집정관은 즉시 성 플로리아노를 체포하여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하고, 이를 거부하자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집정관은 그를 산 채로 불태우는 화형에 처하도록 했다. 성 플로리아노는 “평생 불과 싸운 내가 이제 불꽃을 타고 하늘에 오르게 되었구나.”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는 군인으로서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 외에도 지원자를 모아 소방대를 창설하여 재난 방지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가 만든 소방대의 명성이 점점 퍼져나가 다른 도시에도 그와 비슷한 의용 소방대가 생겨나기도 했다. 성 플로리아노의 소방대를 두려워한 집정관은 화형을 집행하는 대신 성인의 목에 맷돌을 매달아 엔스 강에 던져 익사시키도록 했다. 강물에 빠져 순교한 성 플로리아노는 그로 인해 홍수나 물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청하는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의 시신은 발레리아(Valeria)라는 신심 깊은 여인에 의해 수습되어 로르흐 근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묻혔는데, 성 플로리아노가 그 여인의 꿈에 나타나 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이 안장된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전했고, 그 마을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장크트 플로리안(Sankt Florian)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유해 일부는 1138년에 로마(Roma)로 옮겨졌고,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Lucius III)가 폴란드의 카시미르 2세(Casimir II) 왕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유해 일부를 크라쿠프(Krakuw)의 주교에게 보내주었다. 그 뒤로 성 플로리아노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고, 점차 유럽 전역으로 그에 대한 공경이 퍼져나갔다. 그는 우수한 군인들을 뽑아 의용 소방대를 직접 조직해 화재와 재난으로부터 도시를 구한 이유로 소방관과 굴뚝 청소부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특히 예로부터 밀집된 건물 구조 때문에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던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불을 끄고 있는 성 플로리아노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플로리아노는 보통 로마 군인으로서 머리에 투구를 쓰고, 한 손에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물통을 들어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된다. 또한 순교 장면과 관련해서 맷돌과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5월 4일 목록에서 로르흐에서 목에 돌을 매달고 엔스 강에 던져져 순교한 성 플로리아노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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