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왕국의 첫 여왕이 된 성녀 헤드비지스(Hedvigis)는 1374년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을 통치하던 앙주(Anjou) 왕조의 러요시 1세(Lajos I, 또는 루드비크 1세[Ludwik I]) 왕과 보스니아(Bosnia)의 엘리자베타(Elizabeta) 왕비의 막내딸로 옛 헝가리 왕국의 수도인 부다(Buda)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기 때인 1375년 오스트리아 왕국의 빌헬름(Wilhelm) 공작과 정략적으로 약혼을 하고 1378년부터 1380년까지 빈(Wien)의 합스부르크(Habsburg) 궁정에서 살았다. 1378년 그녀의 맏언니인 카타리나(Catharina)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러요시 1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장차 성녀 헤드비지스와 그녀의 남편이 될 빌헬름을 생각했으나 폴란드의 귀족들은 러요시 왕의 둘째 딸인 마리아(Maria)와 그녀의 약혼자인 룩셈부르크(Luxemburg)의 지기스문트(Sigismund)를 지지하였다. 성녀 헤드비지스가 겨우 여덟 살이 된 1382년에 부친인 러요시 1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녀는 귀족과 왕실 의회의 뜻에 따라 빌헬름과의 약혼을 파기해야만 했다. 장차 결혼을 통해 오스트리아 왕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빌헬름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폴란드의 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성녀 헤드비지스는 1384년 10월 16일 러요시 1세의 뒤를 이어 크라쿠프(Krakow)의 주교좌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폴란드 왕국의 첫 여왕이 되었다. 성녀 헤드비지스는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빌헬름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오직 폴란드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온전히 그 뜻에 순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13살 무렵인 1386년 2월 15일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야기엘로(Jagiello) 대공과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평화를 거의 400년 동안이나 지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결혼 전까지 이교도였던 야기엘로 대공은 성녀 헤드비지스와 결혼하면서 자신과 전 리투아니아 백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였다. 그럼으로써 유럽에서 이교도의 마지막 보루였던 리투아니아 국민이 세례를 받고 폴란드와의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리투아니아 왕국은 전 유럽에서 가장 신앙심 깊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성녀 헤드비지스는 어린 나이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크라쿠프의 바벨(Wawel) 언덕에 있는 대성당으로 가서 죽을 때까지 여왕으로서의 직무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과 용기 그리고 결단력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여왕으로서 앞으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무게를 알기에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며 폴란드 백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성녀 헤드비지스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하고자 노력했고, 폴란드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의 복음화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는 왕국 내의 가난한 이와 병자들을 위한 병원을 건립하고 구호와 자선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리고 카시미르 대왕(Casimir III the Great)이 교황 우르바노 5세(Urbanus V)의 허가를 받아 1364년 크라쿠프에 세운 대학교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카시미르 대왕의 조카 손녀인 성녀 헤드비지스와 남편 야기엘로의 노력으로 리투아니아의 복음화가 큰 열매를 맺자 기존의 법학, 의학, 문과 세 단과대학에 신학대학을 신설할 허가를 받았고, 죽기 전에는 모든 보석을 크라쿠프의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그 후 크라쿠프 대학교는 남편 이름을 따서 야기엘론스키/야기에우워(Jagiellonski/Jagiellonian) 대학교로 불리게 되었다. 성녀 헤드비지스 여왕은 1399년 오랜 기다림 끝에 조산으로 출산한 딸이 사흘 만에 사망한 후 며칠 뒤인 7월 17일 산후 열병으로 인해 크라쿠프에서 선종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성녀 헤드비지스와 딸의 시신은 크라쿠프의 주교좌 대성당에 안치되었고, 그 후 그녀의 무덤은 폴란드 사람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그녀는 1986년 8월 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에 의해 공적으로 시복이 승인되었고, 1997년 6월 8일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의 블로니아 에스플라나데(Blonia Esplanade)에서 15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은 시성식 강론을 통해 폴란드의 온 국민이 그녀의 시성식을 오랫동안 기다렸음을 언급하며, 폴란드의 수호성인인 그녀를 통해 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하나가 되었고 세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엄숙히 선포한다고 했다. 또한 짧은 생애였지만 자신의 지위와 재능 그리고 개인적인 생활 전부를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온전히 바치고, 통치자로서도 백성을 섬기는데 헌신함으로써 위대한 봉사를 실천했다며 그녀의 덕을 칭송하였다. 폴란드어로 야드비가(Jadwiga), 헝가리어로 헤드비그(Hedvig)로 부르는 성녀 헤드비지스의 전례 기념일(축일)은 선종한 날인 7월 17일에 기념했으나 시성식이 거행된 뒤에 폴란드에서는 6월 8일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이날 거행된 시성식은 폴란드 땅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거행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2월 28일에 그녀의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7일 목록에서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헝가리 출신으로 폴란드 왕국의 여왕이 된 성녀 헤드비지스를 기념하는데, 그녀가 리투아니아의 야기엘로(리투아니아어로는 요가일라[Jogaila]) 대공과 결혼하면서 라디슬라오(Ladisla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남편과 함께 리투아니아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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