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또는 히야친토)는 서폴란드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185년 폴란드 남서부 슐레지엔(Schlesien) 근처의 란카(Lanka)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라쿠프와 프라하(Prague)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볼로냐(Bologna)에서 법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폴란드로 돌아와서 크라쿠프 교구장의 비서가 되었다. 그 후 삼촌인 이보 콘스키(Ivo Konski) 신부가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자 참사위원이 되어 1220년 주교와 함께 로마에 갔다. 그곳에서 그는 마침 로마에 와 있던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를 만나 그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즉시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고 성녀 사비나(Savina) 성당에서 착복식을 가졌다.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1222년 크라쿠프에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이를 삼위일체 하느님께 봉헌했다. 그는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를 했다. 그의 뛰어난 설교 덕분에 지원자들이 모이면서 1227년 그다인스크(Gdansk) 공동체를 설립하고, 이어서 폴란드의 여러 곳에 수도회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는 선교 지역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비롯하여 프로이센(Preussen)과 리투아니아(Lithuania) 전역으로 확대해 설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238년 이후 타타르족(Tatar)의 침입으로 많은 수도원이 파괴되어 선교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울 때도 그는 수도원의 복구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특히 깊은 성모 신심으로 유명한데,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많은 치유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성모님과 관련한 그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성 히야킨투스가 키예프(Kiev)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가 타타르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성당이 불길에 휩싸이자 그는 성체를 모신 성합만을 챙겨 겨우 피신했는데, 성당 내부의 성모상에서 “나의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를 가느냐? 나도 함께 데려가 다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성모상은 장정 여러 명이 들기도 어려울 만큼 무겁고 컸다. 그는 이 음성을 듣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모상을 들어 올렸는데, 그에게 성모상은 깃털만큼 가볍게 느껴졌다. 그가 성합과 성모상을 들고 도망치던 길에 강물이 가로막았지만, 그가 강을 건널 때까지 강물이 말라 있었다고 한다. 타타르족의 침입 이후 선교 활동의 중심지인 크라쿠프로 돌아온 성 히야킨투스는 1257년 8월 15일 70세가 넘은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선종한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의 도미니코회 성당에 안장되었고, 1594년 4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폴란드의 사도이자 북유럽의 사도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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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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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히야친토(8.1 ...] | 성 히야친토: 성모 신심 깊은 북유럽의 사도 | 주호식 | 2011/08/13 | 414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