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포르토 마우리치오에서 도메니코 카사노바(Domenico Casanova)라는 선장의 아들로 태어난 성 레오나르두스(Leonardus, 또는 레오나르도)는 파올로 지롤라모 카사노바(Paolo Girolamo Casanov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3세 때 로마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함께 생활하던 아고스티노(Agostino) 삼촌은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가 의사가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삼촌의 기대와는 달리 1697년에 폰티첼리(Ponticelli)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삼촌과는 의절하고 말았다. 수도명으로 레오나르두스를 선택한 그는 로마의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공부하고 1703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709년에 피렌체(Firenze)의 산 프란체스코 델 몬테 수도원으로 갔고, 그때부터 토스카나(Toscana) 전역을 다니며 설교를 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산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가 인콘트로(Incontro) 근교에 수도자를 위한 은둔소를 지었으며, 로마 지역의 선교단을 지휘하면서 6년을 생활하였다. 1736년 그는 산 보나벤투라(San Bonaventura)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지만, 다음 해에 그 직책을 사임하고 다시 선교 길에 올라 열정적인 설교로 거대한 청중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십자가의 길에 대한 열렬한 신심가이자 전파자였다. 또한 성체와 성심 그리고 마리아 신심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잠시 영국 왕위의 주창자인 제임스 3세 국왕의 아내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Maria Clementina Sobieska)의 영적 지도자로 일하다가,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의 명을 받고 코르시카(Corsica)로 가서 설교하고 평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코르시카인들이 그를 선교사로 보기보다는 섬을 통치했던 제노바(Genova) 사람들의 정치적 도구로 보았기 때문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751년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로마의 산 보나벤투라 수도원으로 돌아왔는데, 도착하던 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수도원 성당 중앙제대에 모셔졌다. 43년 동안 열렬한 선교사로 활동했던 그는 1796년 6월 19일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6월 29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본당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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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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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레오나르도(11 ...] | 금주의 성인: 성 레오나르도 | 주호식 | 2024/11/26 | 36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