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카롤루스 요세푸스 에우게니우스 드 마제노(Carolus Iosephus Eugenius de Mazenod, 또는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는 1782년 8월 1일 프랑스 남부 액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중산층으로 수녀원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유했고,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전통 교육을 받았으나 가난했다. 그들의 혼인생활과 성 에우게니우스의 가정생활은 지속적인 집안싸움과 외할머니의 간섭, 신경과민의 이모에 의해 꽤나 괴로웠다. 1790년 12월 13일, 8살의 성 에우게니우스와 그의 가족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하여 이탈리아로 피신했다.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의 니스(Nice), 이탈리아의 토리노(Torino), 베네치아(Venezia), 나폴리(Napoli), 팔레르모(Palermo)에서 11년을 생활했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매일의 생활을 통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대부분의 교육은 베네치아의 본당신부인 바르톨로 지넬리(Bartolo Zinelli) 신부로부터 받았다. 팔레르모에서는 젊고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들과 함께 방탕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끝나고 어머니는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아버지는 외면상의 정치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에 남았다. 아버지가 1802년 가족 소유의 땅을 회수하고자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성 에우게니우스는 부모님을 재결합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9세기 초반에 드문 사건인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유년시절과 지속적인 가정불화와 가정의 파괴는 성 에우게니우스로 하여금 도움이 필요한 가정과 그 구성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수년 동안 성 에우게니우스는 혼자 괴로워하면서 팔레르모에서 경험했던 세속적인 삶에 한 손을 담그고, 다른 한 손은 베네치아에서 바르톨로 지넬리 신부와 함께 경험했던 종교적 삶의 아름다움에 담근 채 생활했다. 해답을 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1805년 수감자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함께 노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하느님께서 승리하시어, 1807년 성 금요일에 십자가 발치 아래에서 신비 체험을 한 성 에우게니우스는 충만한 하느님 사랑의 힘에 의해 감동을 받고 1808년 파리에 있는 성 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811년 29세의 나이로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수품 직후 아미앵의 주교 총대리직을 제안받았으나, 이를 포기하고 액상 프로방스의 본당 신부를 택하여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일하고 선교하였다. 그는 상류층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아닌 지방 사투리를 사용해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 그는 병자들, 수감자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였으며 젊은이들을 보살폈다. 교도소에서 사목할 때 그는 병에 감염되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자기 주변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많은 추수꾼들을 모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카르멜회 수도원에서 일하였고, 그들 중 성직자들은 지역 전체에 걸쳐 본당 업무를 수행하며 프로방스의 선교회를 형성하였다. 이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 명성이 퍼져나가 다른 지역에서도 그들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성 에우게니우스는 공식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26년 2월 17일에 교황 레오 12세(Leo XII)로부터 새 수도회인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원명 : 원죄 없으신 마리아 봉헌 선교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성 에우게니우스는 계속해서 선교사로 남고자 했지만 교회는 그가 설립한 작은 수도회의 발전을 확실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그는 1823년 마르세유의 총대리로 임명되었고, 1832년 10월 14일에는 이코시아(Icosia)의 명의주교가 되었으며, 1834년에 보좌주교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는 그를 1837년 12월 24일에 프랑스 마르세유의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3개의 본당을 설립했으며, 50여개의 성당을 건축하거나 재건하고 은퇴하거나 박해당한 사제들을 돌보았으며, 교계 규율을 재건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교리 교재를 개발하였다. 그는 또한 33개의 수도회들을 교구로 받아들였고, 교구 사제의 숫자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리며 모든 서품식을 집전하였다. 성 에우게니우스 주교는 본당들을 재정비하고 교육에 있어서의 정부의 독점을 약화시키고자 남몰래 노력하였다. 교황직에 대한 적극적 옹호자였던 그는 교회의 일에 대한 정부의 개입에 대항해 싸웠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교황의 선포에 공적으로 찬성했으며 그 교리를 널리 퍼뜨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25권에 달하는 저서를 썼다. 복자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마르세유의 대주교로 승품된 그는 1856년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원로원 회원이 되었고,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859년에는 추기경직을 제안받았다. 1841년 12월 2일 성 에우게니우스 주교의 첫 선교사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였고, 그가 선종할 당시에는 10개국에서 선교하는 6명의 수도회 주교와 400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오늘날 68개의 나라에 5,0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이 선교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성 에우게니우스 드 마제노는 1861년 5월 2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75년 10월 19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5년 12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가정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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