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1046년 헝가리의 레스카(Reska)에서 앵글로 색슨 왕조 최후의 왕인 에드워드 애틀링(Edward Atheling)과 헝가리의 왕비 아가타(Agath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聖王) 스테파노(Stephanus, 8월 16일)의 조카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성 스테파노 왕의 궁중에서 보냈다. 1066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노르망디의 윌리엄(William) 대공이 쳐들어왔고,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패한 후 그녀의 가족들은 헝가리로 피난을 가려고 했으나 배가 표류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Malcolm III)는 성녀 마르가리타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녀의 인품과 선행에 반해 결혼을 청하였다.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성녀 마르가리타는 여섯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낳고 직접 훌륭하게 교육하였는데, 스코틀랜드의 성 다윗 1세(David I, 5월 24일)가 바로 그녀의 아들 중 하나이다.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Synod)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교회 개혁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녀는 또한 남편인 말콤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했고, 던펌린(Dunfermline)에 성삼위 대수도원을 세우고 이오나(Iona)를 비롯한 여러 곳의 켈트 성당들을 복구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왕비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성녀 마르가리타는 겸손을 잃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사랑과 특별히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말콤 3세 왕과 장남 에드워드(Edward)가 노섬브리아(Northumbria)와의 안윅 전투(Battle of Alnwick)에서 사망하고 3일 뒤인 1093년 11월 16일 슬픔에 잠겨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선종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던펌린의 수도원 성당에 묻혔다. 성녀 마르가리타가 선종한 직후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녀를 성인으로 존경했고, 그녀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IV)는 1250년에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고,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 1670-76년 재위)는 1673년에 오래전부터 스코틀랜드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성녀 마르가리타를 사도 성 안드레아(Andreas, 11월 30일)에 이어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0일 목록에서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 가난의 실천으로 유명했던 성녀 마르가리타 여왕에 대해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축일을 6월 10일에 기념했던 것은 1693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 의해서였다. 이미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11월 16일에 헬프타(Helfta)의 성녀 대 제르트루다(Gertrudis Magna)를 기념하고 있었기에 6월 10일을 축일로 정했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녀 마르가리타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11월 16일로 다시 옮겨졌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6일 목록에서 헝가리에서 태어나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 왕과 결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낳고 왕국과 교회의 선익을 위해 헌신하며 기도와 단식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너그러움으로 행한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여왕의 모범인 성녀 마르가리타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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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마르가리타(11 ...] | 성인처럼: 참으로 겸손했던 왕비, 성녀 마르가리타 | 주호식 | 2024/11/10 | 46 | 0 |
1 | [마르가리타(11 ...] |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독서기도|1| | 주호식 | 2006/07/19 | 2254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