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샤를 외젠 드 푸코(Charles Eugene de Foucauld, 또는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9월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여섯 살이 되던 1864년 부모를 차례로 잃고 고아가 되어 외조부인 드 모를레(De Morlet)에게 맡겨졌다. 여기서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촌 누이 마리(Marie)를 만났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와 예수회가 운영하는 낭시(Nancy)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 성실치 않아 성적이 부진했고 또 엄격한 규율 생활을 싫어해 기숙사를 도망쳐 나왔다. 그는 퇴학과 함께 신앙마저 잃고 16세 이후부터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1876년 육군 사관학교와 1878년 기병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로렌(Lorraine) 지방과 알제리 북동부 지역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방탕하고 멋대로 행동하던 그는 1881년 계급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군대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닫고 제대한 후,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하였다. 그는 알제리(Algeria)의 수도인 알제(Alger)에서 1년간 그 지방 언어와 관습을 배운 뒤 사막에서 유대인 랍비의 시종으로 가장하고 2년 동안 생활하였다. 탐험 생활 중 사막의 광활함에서 느낀 고독과 그 안에서 알라(Allah)신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의 순박하고 투철한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886년 10월 사촌누이로부터 소개받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의 앙리 위블랭(Henri Hublin) 아빠스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고해성사를 보고 교회와 화해하면서 성체를 모셨다. 강렬한 성격의 소유자인 푸코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도와 금욕의 삶을 시작했고, 위블랭의 지도를 받으며 봉쇄 생활을 하던 중 은수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그는 1890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던 중 나자렛에서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마리 알베릭(Marie-Alberic)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곧 시리아에 있는 아크베(Akbes)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으로 옮겨 그곳의 허름한 거처에서 1896년까지 지냈다. 1892년 수도서원 후 절대적인 청빈과 자기희생, 절제와 고독을 추구하던 그는 1896년 알제리의 스트라우엘리(Straoueli) 수도원을 옮겼다. 늘 더 큰 고독과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트라피스트회를 떠나 1897년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으로 가서 클라라회 수녀원의 문지기로 살며 1900년까지 밤낮으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의 생활은 가장 비천한 노동, 경건한 독서, 성경 공부, 기도로 이어졌다. 나자렛에서 스승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자신의 성소를 확인한 그는 1900년 파리(Paris)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사제품을 준비한 후 1901년 6월 6일 프랑스 남부 비비에(Viviers)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성 샤를 드 푸코는 수많은 사람이 영적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모로코(Morocco)에 이끌려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 근처 베니 수도원(Beni-Abbes)의 은수처로 들어갔다. 그는 사막의 무슬림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그 방법은 설교가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관상과 사랑의 삶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 ‘보편적 형제’인 하느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과정은 후에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예수 성심의 형제회’(La Fratermite du Sacre-Coeur de Jesus)라고 이름 붙인 은수처에서 늘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오랜 시간 동안 조배를 했다. 1905년 그는 사하라 사막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알제리 남부의 도시인 타만라세트(Tamanrasset) 근처 아하가르(Ahaggar 또는 호가르 Hoggar) 산지에서 가장 높은 아세크렘(Assekrem)에 은수처를 마련한 후, 그곳에서 11년 동안 생활하면서 선교사들이 올 때를 대비하였다. 그는 투아레그족(Tuareg)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관습과 언어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문학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프랑스-투아레그어 사전을 만드는 작업에 헌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가 군종신부나 위생병으로 참여할 것을 생각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의무임을 깨달아 아프리카에 남았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 혼란의 와중에 약탈을 위해 쳐들어온 호전적 무슬림인 사누시파(Sanusi)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으러 프랑스 군인들이 나타나자 성 샤를 드 푸코를 지키던 한 젊은이가 당황한 상태에서 그의 머리에 총을 쏘고 말았다. 12월 1일 타만라세트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로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의 영적 여정을 마무리했다. 사망 후 그의 시신은 투아그레족에 의해 무슬림과 함께 인근에 묻혔다가 1년 뒤에 도착한 프랑스군의 장군에 의해 도랑에서 발견되어 조금 떨어진 곳에 매장하였다. 그리고 1928년에 평소 성 샤를 드 푸코 신부의 뜻과는 달리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던 알제리 중부의 오아시스 도시로 오늘날 엘메니아(El Menia)로 불리는 엘골레아(El Golea)에 옮겨져 재매장하였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가 사막에서 죽은 후 그의 영적인 영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는 사막에서의 고적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누렸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비그리스도교 대중 안으로 파고들어 간 선구자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비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안에서 자신의 복음적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며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사막의 은수자’ 또는 ‘사하라의 사도’라고도 부른다. 그의 좌우명은 ‘예수 사랑’(Jesus Caritas)이란 두 단어였다. 그는 생전에 제자를 두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에 영향을 받은 이들에 의해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 1933년)와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Little Sisters of Jesus, 1939년)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성 샤를 드 푸코 신부가 행한 새로운 형식의 관상 기도가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세속에 살며 실천하는 관상 생활로 침묵 중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복음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사도직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민 지역이나 공장이라는 ‘사막’으로 가서 덕과 관상 기도의 모범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성 샤를 드 푸코 신부는 2005년 11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22년 5월 15일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5만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다른 9위의 복자와 함께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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