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은 1877년 4월 14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아토약(Atoyac)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4년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의 신학교에 입학한 후 가난한 부모를 돕기 위해 몇 년 동안 신학교 과정을 중단하고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소를 지켜 1904년 27세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여러 본당에서 헌신적인 사목자로 활동했고, 쿠퀴오(Cuquio) 본당에서 사목할 때 고아들과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 수도회로 ‘성심의 클라렛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반가톨릭적인 멕시코 정부가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고 있을 때 그는 피신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나는 살든지 죽든지 이곳에서 나의 양떼와 함께 하겠다.”라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교구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계속하기 위해 그는 본당의 보좌인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Atilano Cruz Alvarado) 신부와 함께 인근의 한 목장 주택을 피신처로 삼아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두 신부는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사제로서 사목을 계속할 수 있는 계획을 논의했다. 1928년 7월 1일 이른 새벽, 쿠퀴오의 시장과 40여 명의 정부군이 목장을 급습했다. 군인들이 그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용감하게 “그리스도 왕 만세!”를 외쳤고, 즉시 군인들이 쏜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과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신부의 시신은 쿠퀴오 중앙 광장에 버려졌고, 용감한 신자들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쿠퀴오의 성 필립보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은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그들의 기념일은 시성식이 거행된 5월 21일로 결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그들이 각각 순교한 날 목록에서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5월 21일 목록에서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이 멕시코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리스도 왕을 고백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날 시성식에서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멕시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Maria de Jesus Sacramentado, 7월 30일) 수녀를 성인품에 올려 모두 27위의 멕시코인 성인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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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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