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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헨리 뉴먼(10.9)

요한 헨리 뉴먼(10.9)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요한 헨리 뉴먼 (John Henry Newman)
축일 10월 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추기경
활동지역
활동연도 1801-1890년
같은이름 앙리,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존 헨리 뉴먼, 죤, 지오반니, 하인리히, 한스, 헨리꼬, 헨리꾸스, 헨리코, 헨리쿠스, 후안
성인 기본정보

   성 요한네스 헨리쿠스 뉴먼(Joannes Henricus Newman, 또는 요한/존 헨리 뉴먼)은 1801년 2월 21일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Lond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성공회 신자인 부모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 할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유년기와 청년기에 여러 번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적인 위기와 회심도 경험하였다. 그는 7살 때 런던의 사립학교인 얼링(Ealing) 학교에 입학했고, 15살이 된 1816년 금융업자인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움으로 겪던 중 열병이 발병해 5개월 정도 큰 고생을 하였다. 그때 그는 복음주의 성직자인 월터 마이어스(Walter Mayers)의 도움으로 여러 신앙 서적을 읽으며 당시 영국 사상계를 지배하던 무신론으로 이끄는 회의주의나 과학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817년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옥스퍼드대학교를 구성하는 트리니티대학(Trinity College)에 입학해 수학하고, 1822년 오리엘대학(Oriel College)에서 평의회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1824년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29일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아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그는 1826년에 오리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828년에는 오리엘대학 안에 있는 성 마리아 성당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1829년 성공회 고교회파에 속한 리처드 허렐 프루드(Richard Hurrell Froude) 신부와 친구가 되면서 저교회파 배경에서 성장한 그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세기 영국 성공회에는 고교회파(高敎會派, High Church)와 저교회파(低敎會派, Low Church)가 있었는데, 고교회파는 고대 그리스도교로부터 내려오는 사도 전승을 따르며 교회의 권위 및 전례와 성사를 강조하면서 가톨릭교회와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저교회파는 교회의 권위와 성사성(聖事性)을 낮게 평가하면서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개신교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1832년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친구인 리처드 허렐 프루드가 요양을 위해 아버지인 로버트 허렐 프루드(Robert Hurrell Froude) 대주교와 함께 지중해로 떠날 때 동행하였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영국 땅을 벗어나 이탈리아 로마(Roma)를 포함해 실제로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리처드 프루드 신부 일행이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열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후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넓히고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833년부터 성공회의 쇄신과 부흥을 주장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 1833~1841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16년 성공회 사제가 된 고교회파 소속 존 키블(John Keble, 1792~1866년) 신부는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부가 교회 활동과 교회의 재산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정치 · 사회적 운동을 전개했는데, 초대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신학적 · 사목적 관점으로 점차 전환하였다. 그는 1833년부터 성 요한 헨리 뉴먼과 함께 영국 성공회의 쇄신과 탈국교화(脫國敎化)를 주장하며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과 전례를 연구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꾸준히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로 인해 ‘옥스퍼드 운동’은 ‘소책자 운동’(Tractarianism)으로도 불렸고,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은 ‘소책자 운동가들’(Tractarians)로 불렸다. 소논문집인 이 소책자는 90호까지 이어졌고, 1841년에 발간된 90호에서 성 요한 헨리 뉴먼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결정했던 사항들이 영국 국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공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와 성공회 주교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1842년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리틀모어(Littlemore)라는 작은 마을로 물러나 준(準)수도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다.

   1845년 10월 6일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고”의 집필을 끝낸 후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결심하고, 3일 후에 리틀모어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동료들과 함께 예수 고난회의 복자 도미니코 바르베리(Dominicus Barberi, 8월 27일) 신부의 도움으로 가톨릭교회로 개종하였다. 개종 후 그는 1846년 리틀모어를 떠나 교황 감목대리가 있던 버밍엄(Birmingham)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일랜드 출신 니콜라스 와이즈먼(Nicholas Wiseman, 1802-1865) 신부의 권유로 가톨릭교회의 사제가 되기로 한 그는, 그해 10월 로마로 가서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복음화부)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신학 강의를 청강하고,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한 후 1847년 5월 30일 사제품을 받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성 요한 헨리 뉴먼 신부는 성 필립보 네리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1848년 버밍엄에서 영국 오라토리오회(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50년 비로소 영국에서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가 복원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국 성공회 신자들의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한 반감도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니콜라스 와이즈먼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영국 언론은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복원을 교황청의 침략이라고 비난했고, 성공회 신자들도 교황과 추기경의 형상을 만들어 불태우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신문지면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박과 변론을 기고하면서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 신설된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학 설립 허가가 나오지 않아 아일랜드 주교단에 사의를 표명하고 1858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출판물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 유익한 글과 작품을 많이 남겼다.

   1864년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 특히 성 요한 헨리 뉴먼을 겨냥해 그의 도덕과 사상은 진리가 담겨 있지 않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자기와 다른 성직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적 변천 과정을 담은 “나의 생애를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여기서 그는 솔직하고 공정한 내용으로 영국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이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의혹과 오해를 말끔히 씻어냈고, 영국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그의 중요한 위상이 다시금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1869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 2월 7일)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여 년 만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 성 요한 헨리 뉴먼을 초대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성대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낯설어한 그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버밍엄의 오라토리오회에 계속 머물렀다. 그는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이 신앙 교리로 선포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의회가 이를 선포하면 제일 먼저 승복하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1879년 성 요한 헨리 뉴먼이 주교도 아니고 로마에 머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기경에 서임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업적을 인정하였다. 78세의 성 요한 헨리 뉴먼은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가서 추기경의 영예를 받고 버밍엄으로 돌아와 여생을 오라토리오회 수도원에서 보내다가 1890년 8월 11일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그는 2010년 9월 19일 영국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시복되었고, 2019년 10월 13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라 종교개혁 이후 영국 출신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이 성녀 클라라 축일과 중복되는 관계로 오라토리오회와 잉글랜드와 웨일즈 가톨릭 주교회의는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10월 9일을 축일로 정해 경축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는 그대로 8월 11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성 요한 헨리 뉴먼은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면서 두 교회가 소모적 논쟁을 하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양측 신자들이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이바지하였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교회쇄신을 위한 개혁적 사상과 참된 교회일치운동의 모범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중요한 사상적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공의회의 ‘숨겨진 교부’라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자료

  • 에이버리 덜리스 저, 윤성희 역, 존 헨리 뉴먼, 서울(성바오로), 2010년.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헨리 뉴먼', 서울(으뜸사랑), 2014년, 247-252쪽.
  • 펠리시티 오브라이언 저, 허종열 역, 평화가 아니라 칼을 -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생애와 메시지, 왜관(분도출판사), 2014년.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뉴먼, 존 헨리',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1442-1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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