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펠릭스는 3세기 후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Tunis] 일대에 있었던 고대 도시) 근처 스킬리움(Scillium, 또는 실리움)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구인 성 쿠쿠파스(Cucuphas, 7월 25일)와 함께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레아(Caesarea de Palestina 또는 Caesarea Maritima)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처음 만나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는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마지막 박해가 될 대박해를 시작했다. 성 펠릭스와 성 쿠쿠파스는 아직 박해가 시작되지 않은 스킬리움을 떠나 상인으로 변장하고 박해가 극심한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onia) 지방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성 쿠쿠파스는 바르셀로나(Barcelona)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인들을 돕다가 체포되어 카스트룸 옥타비아눔(Castrum Octavianum)에서 순교했다. 그가 순교한 곳에 나중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의 이름을 따서 산쿠가트델바예스(Sant Cugat del Valles)라는 도시가 형성되었다. 한편 성 펠릭스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 헤로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며 모범적인 삶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결국 성 펠릭스는 체포되어 당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주도한 다키아누스 법무관 앞으로 끌려갔다. 성 펠릭스는 로마의 신을 숭배하고 공개적으로 배교하라는 요구를 물리치고 신앙을 고백했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신앙에 분노한 다키아누스는 온갖 고문을 자행하고 그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등 뒤로 묶고 목에 맷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천사의 도움으로 해변으로 밀려와 목숨을 건졌으나 다시 쇠갈고리로 살과 뼈를 찢는 고문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헤로나 외곽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곧 순례지가 되었으며 그 위에 작은 경당이 지어졌다가 나중에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그 성당이 헤로나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성 펠릭스(Sant Feliu) 대성당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일 목록에서 에스파냐 헤로나에서 성 펠릭스가 다키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여러 고문을 견딘 후 칼에 찔려 순교함으로써 굴복하지 않는 영혼을 그리스도께 바쳤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에스파냐 북부 헤로나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성 펠릭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성 펠릭스는 헤로나와 에스파냐, 포르투갈, 북아프리카에서 높은 공경을 받는데, 같은 이름의 헤로나 순교자로 성 나르치소(Narcissus, 3월 18일) 주교의 부제로서 그를 수행해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까지 갔다가 헤로나로 다시 돌아와 순교한 성 펠릭스(3월 18일)와 자주 혼동되곤 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고, 8월 1일에 기념하는 성 펠릭스는 아프리카 출신의 평신도 순교자이다. 옛 “로마 순교록”이 3월 18일에 기념했던 헤로나의 성 나르치소 주교와 성 펠릭스 부제에 대해 개정 “로마 순교록”은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더는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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