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닐루스(또는 닐로)는 소아시아 갈라티아(Galatia) 지방의 안키라(Ancyra, 오늘날 튀르키예의 수도인 앙카라[Ankara])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지방장관직을 맡고 있던 그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의 제자가 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둔 기혼자였는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의해 개종한 후 모든 것을 버리고 금욕적이고 은둔적인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 테오둘루스(Theodulus)와 함께 시나이산으로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그의 아내와 딸도 그의 모범을 따라 이집트에 있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라센의 유목민들이 그의 아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았고, 그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가 팔레스티나의 엘루사(Elusa,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Negev] 사막에 있었던 고대 도시)에서 극적으로 아들을 찾았다. 엘루사의 주교는 강도들로부터 그의 아들을 사서 성당의 문지기로 지내도록 했었고, 성 닐로와 그의 아들을 사제로 서품한 후 시나이산으로 돌아가 살도록 했다. 아들과 함께 시나이산으로 돌아온 성 닐로는 남은 생애 동안 주님을 섬기며 살았다. 그가 언제 선종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43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일부 전승에서는 45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유해는 유스티누스 황제(565~578년 재위) 때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거룩한 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2일 목록에서 이러한 전승을 반영해 콘스탄티노플의 성 닐로가 그 도시의 행정장관 직책을 사임하고 수도승이 되어 수도원장으로서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시대(346~395년)에 학문과 거룩함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시나이산의 성 닐로에 관한 전승은 그다지 신뢰하기 어려운 자서전적 전기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오늘날 그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의 갈라티아 지방 앙카라 근처에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제자로 여겨지는 성 닐로 수도원장이 오랫동안 수도원을 다스리며 자신의 저서를 통해 금욕주의를 널리 전파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안키라 출신의 성 닐로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학생으로 공부하던 때 그곳의 총대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고, 고향인 안키라로 돌아와 근처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원장이 되었다. 일부 전승에서는 그를 주교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는 수도승들을 위해 윤리적이고 금욕적인 주제로 많은 글을 썼고, 그에게 영적인 도움을 받고자 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편지를 교환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보존되고 있다. 그는 ‘현자 닐로’(Nilus the Wise)라고도 불렸다. 그는 아르카디우스 황제(395~408년 재위)에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두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안키라의 성 닐로’는 ‘시나이산의 성 닐로’와 종종 혼동되었는데, 그 둘 중에서 누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제자이자 친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개정 “로마 순교록”은 안키라의 성 닐로 수도원장에 대해서만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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