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목록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히야친타 마르토(2.20)

히야친타 마르토(2.20)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히야친타 마르토 (Jacinta Marto)
축일 2월 20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소녀, 환시자
활동지역 파티마(Fatima)
활동연도 1910-1920년
같은이름 자신따, 자신타, 자친따, 자친타, 히야친따, 히야킨따, 히야킨타
성인 기본정보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Franciscus Marto)와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Hyacintha Marto)는 남매 사이로 포르투갈 중부 레이리아(Leiria) 교구에 속한 파티마 본당의 알주스트렐(Aljustrel)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마누엘 페드로 마르토(Manuel Pedro Marto)와 올림피아 데 헤수스(Olimpia de Jesus)의 마지막 두 자녀로 태어났다. 성 프란치스코는 1908년 6월 11일 알주스트렐에서 태어나 같은 달 20일 파티마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여동생인 성녀 히야친타도 1910년 3월 11일 알주스트렐에서 태어나 같은 달 19일 파티마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정치적 ·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포르투갈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한 보통의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기에 읽고 쓸 줄도 몰랐고, 산 너머 바깥세상의 지리 · 역사 · 사상 등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그들이 받은 그리스도교 교육은 매우 단순했다. 그들은 집에서 교리문답을 배우거나 사촌지간인 루치아 데 헤수스(Lucia de Jesus)의 어머니인 이모에게 교리를 배웠는데, 루치아는 그들과 함께 파티마의 성모 발현을 목격한 세 명의 어린 환시자 중 한 명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히야친타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삶을 통해 헌신적인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주일 미사 참례와 가족 기도, 진실과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한 자선이 바로 그 예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도와 양 떼를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성 프란치스코는 여덟 살, 성녀 히야친타는 여섯 살이었다. 그들은 시간 대부분을 아홉 살로 역시 양치기로 일하던 사촌 루치아와 함께 양 떼를 돌보며 지냈다.

   1916년 봄 · 여름 · 가을에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히야친타와 루치아는 평화의 천사가 발현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는 8월을 제외하고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다. 어린 양치기들이 1917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오우렘(Ourem)에 있었기 때문에 8월에는 19일에 발현했다. 1907년 3월 22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나중에 가르멜회 수녀가 되어 평생 자신에게 맡겨진 파티마 성모의 메시지에 봉헌된 삶을 살다가 2005년 2월 13일 97살의 나이로 선종하여 2023년 가경자로 선포된 수도명 루치아 도스 산토스(Lucia dos Santos) 수녀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성인들의 모습과 발현 체험과 성모님의 메시지에 대해 전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성 프란치스코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성품을 지녔고, 창조물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음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외심에서 체득한 평화를 친구들에게 전수했고, 논쟁이나 불화가 일어났을 때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법을 알았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성녀 히야친타는 다정한 성격에 감미로운 노래와 춤에 재능이 있었다고 했다.

   루치아 수녀의 회고록에 따르면 1917년 5월 13일, 첫 번째 발현 때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했고, 앞으로 6개월 동안 매달 13일에 발현이 이루어진 그 장소로 오라고 말씀했다고 한다. 천사와 성모 마리아의 발현 이후, 그들의 생활 방식은 경배와 관상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기회가 될 때마다 외딴곳에 숨어 혼자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종종 본당의 감실 근처에서 침묵 속에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숨어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했다.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고통에 슬퍼하시는 하느님을 엿보았다. 그는 주님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주 하느님을 위로하고 싶어 했다. 천사와 성모 마리아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고 오직 눈으로만 볼 수 있었던 성 프란치스코는 세 명의 환시자 중 가장 깊은 관상의 단계를 지녔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침묵에 귀 기울임으로써 기도가 어떻게 자라나는지 보여주었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서 느끼고자 노력했다. 그는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몰랐습니다!”라는 현존의 체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기도에 초대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생활은 관상의 삶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18년 10월에 성 프란치스코는 당시 유럽을 휩쓴 독감의 희생자가 되었다. 독감에 걸린 성 프란치스코의 상태는 1919년 4월까지 점점 악화했고, 4월 2일 고해성사를 받고 다음 날 집에서 노자성체를 받아 모셨다. 다음 날인 4월 4일 오후 10시경,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올라갔다. 그는 1919년 4월 5일 파티마 묘지에 묻혔고, 1952년 3월 13일 그의 유해가 파티마의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Basilica de Nossa Senhora do Rosario)으로 이장되었다.

   루치아 수녀에 따르면 성녀 히야친타는 다소 변덕스러웠지만, 다정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사촌인 루치아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었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다. 천사와 성모 마리아의 발현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녀는 특히 ‘불쌍한 죄인들’의 고통과 교황 성하의 사명과 수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실제로 발현을 체험한 이후 그녀는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관대한 마음으로 바꾸고, 자신을 잊고 타인의 선을 위해 살며,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성녀 히야친타의 영적인 면모는 믿음의 관대함과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녀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마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자주 표현했다. 독감에 걸린 이후에도 병으로 인한 고통을 포함해 하루의 모든 순간을 죄인들의 회개와 교황 성하를 위해 자신을 하느님께 바칠 기회로 여겼다. 그녀는 가난한 이들과 간식을 나누며, 타인의 유익을 위해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금식의 희생을 바쳤다. 루치아 수녀는 회고록에서 성녀 히야친타에 대해 말하길, 사랑을 위해 기도하고 고통받는 것이 그녀의 이상이었고, 그녀가 말했던 연민의 삶이며 신앙생활이었다고 전해주었다.

   성녀 히야친타는 1918년 말에 오빠처럼 치명적인 독감에 걸렸다. 그녀는 1919년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오우렘의 빌라노바(Vila Nova de Ourem) 병원에 입원했다. 그날부터 왼쪽 가슴에 통증이 생겼고, 점점 건강이 악화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그녀는 리스본(Lisbon)의 어린이 병원인 도나 에스테파니아(Dona Estefania)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그해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그녀는 기적의 복되신 동정녀 고아원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성녀 히야친타는 성체를 조배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20년 2월 2일, 그녀는 화농성 흉막염과 두 갈비뼈의 골염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성녀 히야친타가 더 이상의 치료가 소용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수술이 결정되었다. 그녀는 1920년 2월 10일 수술을 받고, 갈비뼈 두 개가 제거되었지만 가슴 왼쪽의 큰 상처는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2월 20일 오후, 성녀 히야친타는 병자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 싶다고 청했다. 하지만 병원의 원목 사제는 그녀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녀 히야친타는 1920년 2월 20일 오후 10시 30분에 홀로 세상을 떠났고, 2월 24일 오우렘의 묘지에 묻혔다. 1935년 9월 12일에 그녀의 유해는 파티마 묘지로 이장되었고, 1951년 5월 1일에 파티마의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재이장되었다.

   1952년 4월 30일, 레이리아 교구장 호세 알베스 코레이아 다 실바(Jose Alves Correia da Silva) 주교는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의 시복시성을 위해 그들의 성덕과 덕행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였다. 1987년 11월 6일 두 재판이 모두 유효하다고 선언되었고, 1989년 5월 1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하느님의 종들의 영웅적 덕행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기적 심사가 통과되어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가 2000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두 복자의 중재를 통해 하느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인정되자 2017년 3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시성성을 통해 그들의 기적에 관한 교령 선포를 승인하였다. 그리고 2017년 5월 13일 파티마의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파티마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와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를 성인품에 올리는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은 순교하지 않고 성인품에 오른 이로는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어린 성인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강론을 통해 그들이 단순히 발현을 목격해서 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성모님의 당부대로 죽는 순간까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성인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4일 목록에 당시 복자였던 성 프란치스코 마르토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면서, 그가 포르투갈의 파티마 근처 알주스트렐이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병으로 급격히 쇠약해졌음에도 쾌활한 성격과 역경과 신앙 안에서의 인내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 빛나는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2월 20일 목록에 당시 복녀였던 성녀 히야친타 마르토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그녀가 파티마 근처 알주스트렐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소녀였지만 자신이 앓았던 병의 고통을 인내를 갖고 견디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열렬히 증거했다고 기록하였다.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이들 남매의 축일을 성녀 히야친토 마르토의 축일인 2월 20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한편 로마 보편 전례력과 라틴어판 “로마 미사 경본” 제3 표준판(2002년)은 2002년부터 매년 5월 13일에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자유롭게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일로 추가하였다.♣

참고자료

  • 루치아 도스 산토스 저, 대전가르멜여자수도원 역, 파티마(루치아 수녀 회고록), 서울(가톨릭출판사), 2021년.
  • 최하경 저, 세계의 성모 발현 성지를 찾아서 - 포르투갈 파티마, 왜관(분도출판사), 2024년, 277-305쪽.
  • 페르난도 레이테 저,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역, 파티마의 목동 히야친따, 서울(아베마리아출판사), 1996년.

사진/그림

자료실

성인 게시판
번호 성인명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추천수
21 [히야친타 마르토 ...] 파티마의 구원을 비는 기도와 관련한 신학적 성찰 주호식 2025/09/15 53 0
20 [히야친타 마르토 ...]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포르투갈 파티마(1917년) 주호식 2025/09/15 33 0
19 [히야친타 마르토 ...]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성모님이 나타나셨어요 - 포르투 ... 주호식 2025/09/15 17 0
18 [히야친타 마르토 ...] 파티마 성모 발현 증인 루치아 수녀, 가경자로 선포 주호식 2025/09/15 20 0
검색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