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조반니 프란체스코 카레리(Giovanni Francesco Carreri, 또는 요한 프란치스코 카레리)는 1420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만토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이 된 1440년에 고향에 있는 도미니코회(Ordo Fratrum Praedicatorum, OP)에 입회하면서 마태오(Matthaeus)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그는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며 설교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설교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영성 수련과 관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제노바(Genova)에서 피사(Pisa)로 설교 여행을 하던 중 튀르키예 해적들에 의해 나포된 것이었다. 그는 해적 두목에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자신들의 여행 목적을 설명해 두 명의 동료 수사와 함께 석방 허가를 받았다. 그때 그는 배 안에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이 여전히 갇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알제리에 노예로 팔려 갈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해적 두목에게 그들의 몸값을 대신해 자신을 데려가라고 했고, 그의 용기 있는 희생에 충격받은 해적 두목은 그들 모두를 풀어주었다. 복자 마태오 카레리는 도미니코회 3회원인 복녀 스테파나 드 퀸차니(Stephana de Quinzani, 1월 2일)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어린 그녀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장차 자신의 영적 상속자가 되리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의 의미는 후에 복녀 스테파나 드 퀸차니가 그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깊이 헌신한 결과로 얻은 상흔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때 분명해졌다. 그는 1470년 10월 5일 파비아(Pavia) 지방의 비제바노(Vigevano)에서 선종하였다. 비제바노 주민들은 1482년에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로부터 그의 유해 이장과 공적인 전례 안에서 기념하는 것을 허가받았고, 1518년에는 자기들 도시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의 유해는 비제바노의 성 베드로 순교자(San Pietro Martire)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는 1625년에 그에 대한 공경을 재확인했고,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XIV)도 1742년 9월 23일 그에 대한 공경을 다시 확인하면서 만토바와 비제바노의 성직자와 도미니코회에서 그를 기념하는 시간전례(성무일도)를 거행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5일 목록에 롬바르디아의 비제바노에서 기념하는 설교자회(도미니코회)의 신부인 복자 마태오 카레리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그가 당대에 하느님의 말씀을 날카롭고 웅변적으로 설교하는 설교가로 활동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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