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로마 순교록”은 9월 18일 목록에서 고대 소아시아 남서부 리키아(Lycia) 지방 올림푸스의 주교이자 나중에 티레(Tyre, 오늘날 레바논 남부의 항구 도시)의 주교가 된 성 메토디우스(또는 메토디오)가 웅변과 학식으로 유명했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마지막 박해가 끝날 무렵 그리스의 칼키스(Chalcis, 오늘날 그리스의 할키다[Chalkida])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고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가 전해주었다고 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그가 티레의 주교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리키아 지방 파타라(Patara, 오늘날 튀르키예 남서부 안탈리아주[Antalya州]의 겔레미스[Gelemis] 근처에 있었던 고대 해안 도시)의 주교로 언급하기도 하고, 당시 올림푸스와 파타라가 하나의 교구로 통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순교 장소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는데, 리키아 지방의 주교인 성 메토디오가 그리스의 칼키스에서 순교한 것은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고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의 안타키아[Antakya]) 인근에 있는 칼키스 사막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오늘날 정통 교리에 충실하며 뛰어난 저술가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오리게네스의 일부 주장에 대해 체계적으로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방 정교회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그는 당대 신플라톤학파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반그리스도교 학자였던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를 반박하는 “십자가에 관해 포르피리우스 반박”(Contra Porphyrium de cruce)을 썼고, 죽은 뒤 육체의 속성에 관해 두 편으로 나눠 대화하며 죽음 이후 인간은 새롭고 영적인 육체로 부활한다는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성경에 근거하여 반박하는 “죽은 이들의 부활”(De resurrecione mortuorum)도 저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는 영원하기에 부활한 육체와 이전의 육체가 물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발렌티누스파 또는 플라톤주의자와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이가 벌이는 대화집인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악의 근원임을 강조하며 이원론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고 원어로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을 본보기 삼아 수준 높은 문체로 쓴 대화집인 “열 처녀의 향연”(Symposion seu convivium virginum)이다. 여기서 그는 덕(德)의 정원에서 열린 향연에 열 명의 처녀가 참여하여 각자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에로스’(Eros)가 아니라 ‘동정’(Parthenia)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이상으로 찬양하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혼인에 관한 찬미가로 끝맺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동방 정교회의 기념일인 6월 20일로 그의 축일을 옮겨 올림푸스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메토디오를 기념한다고 했다. 그는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로 작품을 썼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박해가 끝난 후 312년경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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