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민극가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인천의 어느 외교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굳고도 온화한 성격과 바르고도 냉정한 판단력을 소유했던 그는 아주 어릴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 뒤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천주교에 들어와서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20세에 이르러 어느 교우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곧 상처하였다. 재혼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부모 형제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재혼하였지만, 딸 하나를 두고 아내가 세상을 떴으며 그 딸 역시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때부터 스테파누스는 이리저리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하거나 가르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전교하여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또한 그는 종교서적을 베껴주고 받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니, 신부들은 그의 열성과 박애심을 높이 평가하여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또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민 회장은 어느 배교자의 밀고에 따라 체포되었다. 포장이 “이 교를 버리겠다고 하면 즉시 놓아주마.” 하자 그는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내 종교를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교하여 회두시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포장은 성이 나서 치도곤을 매우 치게 하면서 “이 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 사정없이 쳐라”고 소리질렀다. 이리하여 그는 치도곤 40대를 맞았다. 옥중에서도 스테파누스는 형벌로 인한 상처를 못 이겨 신음하면서도 배교자를 꾸짖고, 목숨을 아까워하여 가족을 걱정하는 신자들을 격려하며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권면하였는데, 그의 노력이 눈에 띄게 효과를 내어 약한 신자 여러 사람이 배교를 철회하고 통회하였다고 한다. 이 이튿날도 그는 곤장 40대를 맞았지만 처음과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민 스테파누스는 옥에 갇힌 지 5, 6일 후인 1840년 1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음으로써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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