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박봉손 막달레나(Magdalena)는 서울의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15세 되던 해에 시골로 시집간 후 딸 둘을 낳고는 과부가 되었다. 이어서 시부모마저 여의게 되니 하는 수 없이 서울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때 친정에는 김 체칠리아라는 훌륭한 여교우가 새어머니로 와 있어서, 박봉손은 새어머니의 권고와 가르침을 받아 1834년경에 입교하고 수계생활을 시작하였다. 입교한 후 그녀는 남대문 밖 이문골에 살고 있던 외삼촌 김사문의 곁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집은 작은데다가 가난한 사람, 늙은이, 어린이 등 10여 명이 동거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게다가 교우들의 왕래가 잦고 보니 번잡함이 그지없었다. 그러나 박봉손은 그런 중에도 궂은 일은 자기가 도맡아하고 쉬운 일은 남에게 사양하였으며, 번잡한 중에서도 즐거워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적이 없었다. 그녀는 온갖 시련 속에서도 마음이 한결같고 또 지극히 겸손했다. 입교한 지 5년 만에 박해가 시작되자 외삼촌과 함께 남대문밖 이문골에 살고 있던 다른 사람은 모두 피신했으나, 박봉손은 혼자 집을 지키며 순교의 마음을 굳히고 포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839년 3월 중순 어느 날, 다른 날처럼 기도하고 있다가 포졸들이 달려들어 외삼촌과 박봉손을 함께 잡아갔다. 박봉손은 오라에 묶인 채 포장 앞에 끌려나와 첫 번째 문초를 받았다. 포장은 “배교하고 집사람들의 간 곳을 대라. 그리고 책과 동교인들을 대지 않으면 심하게 때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그녀는 “배교는 할 수 없고, 집안사람은 저도 모르게 피신하여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으며, 동교인과 책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나이다.” 하고 단호히 응수하였다. 그러나 포장은 피신한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고도 형벌을 더하고 주리를 틀게 하였으나, 박봉손은 혹형 중에서도 침착하게 “과연 어떤 사람이 내왕했는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할 뿐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으며 또한 마음을 조금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형관이 이제라도 단념하면 놓아 주겠다고 달래보았으나 그녀는 “단념하려 했으면 벌써 포청에서 했을 것인데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 치명하고자 함이니 국법대로 죽여주십시오.” 하고 대답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4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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