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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페트루스 클라베르(Petrus Claver, 또는 베드로 클라베르)는 1580년 또는 1581년 6월 26일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 지방 바르셀로나(Barcelona) 근처 베르두(Verdu)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 농부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 후안 페드로(Juan Pedr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적, 영적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1593년 그가 13살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며칠 뒤에는 동생도 잃었다. 이때부터 이미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서약하고 1595년 고향에서 삭발례를 받은 후 사제인 삼촌의 후원을 받아 이듬해에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대학에서 문학과 예술, 수사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배우기 위해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벨렌 대학(Colegio de Belen)에 들어가면서 예수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곳에서 예수회에 대한 소명을 느낀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학업을 마치고 1602년 8월 7일 타라고나(Tarragona)에 있는 예수회 수련소에 입회하였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1604년 8월 8일 첫 서원을 한 후 인문학 공부를 위해 헤로나(Gerona)로 보내졌고, 이듬해부터 철학 공부를 위해 팔마 데 마요르카(Palma de Mallorca)에 있는 몬테시온(Montesion) 예수회 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1608년까지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같은 예수회의 수사로 거의 평생을 문지기로 지낸 고령의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Alfonsus Rodriguez, 10월 31일)를 만나 그와 함께 기도와 성덕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는 젊은 성 베드로 클라베르가 사제가 되는 데 대한 불안감을 없애주고 신대륙 선교에 관심을 두도록 권고하였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게 된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다시 바르셀로나 대학으로 가서 2년 정도 신학을 공부한 후 관구장의 지시로 1610년 다른 3명의 예수회 동료들과 함께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Cartagena) 항구에 도착했다. 그는 1612년부터 1615년까지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Bogota)에서 신학을 더 공부하고, 1616년 카르타헤나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콜롬비아는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고, 콜롬비아의 인디오들은 혹독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아 광산이나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시켰고, 앙골라와 서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잡혀 온 흑인 노예들을 짐승처럼 대하며 잔혹한 행위를 일삼고 있었다. 게다가 카르타헤나는 노예 매매의 중심지였기에 성 베드로 클라베르 신부는 이런 상황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는 종신서원을 하면서 고통받는 흑인 노예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수도명을 ‘흑인 노예들의 영원한 노예 베드로 클라베르’라고 지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흑인 노예들을 돌보며 선교 활동을 펼쳤던 예수회의 알폰소 데 산도발(Alfonso de Sandoval)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콜롬비아 인디오와 흑인 노예들을 돌보고 그들의 처참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에스파냐 정부의 허가를 받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을 태운 배가 도착하면 통역자와 간호사와 함께 가서 그들을 치료하고 음식을 제공하며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다. 그는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기다리다가 오랜 항해로 지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해주고, 그림이나 통역자를 통해 노예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그들의 수용 막사를 방문하여 나병에 걸린 노예들을 돌봐주면서 그들의 벗이 되었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40년 가까이 흑인 노예들을 위해 헌신했는데, 그가 생전에 세례를 준 흑인 노예만도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온종일 노예들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주었고, 카르타헤나의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그의 영적 자녀가 될 정도로 전 생애를 흑인 노예들을 위해서 살았다. 그는 흑인이 아닌 일반 신자가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면 “나는 흑인 노예들의 고해 신부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고, 귀부인이 찾아와 성사를 청하자 “나의 고해성사는 당신의 화려한 옷에 걸맞지 않습니다. 나의 성사는 가난한 흑인 노예들의 것입니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엄격한 생활을 실천했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초자연적 은혜를 받아 예언도 하고 기적을 행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힘도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는 1650년에 전염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전 4년 동안 누워서 생활해야 했다. 그동안 예수회 회원도 줄어들었고, 수도원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전염병으로 인한 혼란과 공포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중에 작은 방에서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힌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그를 돌보던 흑인 하인조차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그에게 분풀이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고 모두 참아냈다. 그는 1654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미사에서 마지막 영성체를 한 후 혼수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임종 소식을 듣고 카르타헤나의 사람들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를 기억하고, 그를 참배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과 성직자와 당국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살아서도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던 그의 탁월한 영성과 신심, 그리고 흑인 노예들을 통해 드러난 기적 이야기까지도 점차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적으로 전해졌다. 그의 유해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된 카르타헤나의 산 페드로 클라베르(San Pedro Claver) 성당 중앙 제단에 안치되어 있다. 18세기 중엽 그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된 후 1850년 7월 16일 교황 비오 9세(Pius IX)가 그를 시복하였고, 1888년 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그에게 선교 열정을 심어준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6년에 그를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현재 그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 선교의 수호성인이며 ‘흑인의 사도’로 불린다. 콜롬비아 의회는 그를 기념해 9월 9일을 인권의 날로 선포했고, 미국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흑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과 이민자들의 인권이 올바르게 인정받도록 활동하여야 할 사명을 되새기는 날로 기념하고 있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가 선종한 날은 9월 8일이지만 그날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이기 때문에 다음날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9일 목록에서 남아메리카의 카르타헤나에서 예수회 소속 사제요 증거자인 성 베드로 클라베르가 40여 년 동안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놀라운 자기희생과 사랑으로 봉사하며 거의 30만 명에 달하는 노예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고,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8일 목록에서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성 베드로 클라베르 사제가 선종했는데 다음 날 축일을 기념한다고 했다. 그리고 9월 9일 목록에서 예수회 소속 사제인 성 베드로 클라베르가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노예로 전락한 흑인들을 위해 40년 넘게 헌신적인 자기희생과 뛰어난 자비심을 발휘했고, 직접 거의 30만 명의 흑인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로써 새롭게 태어나도록 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십자가를 높이 든 예수회 사제로서 흑인 노예들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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