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 시험제도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조선 영조 25년에 세운 건물이다. 옛 이름은 관덕당(觀德堂)이었다.
관덕정은 옛 아미산 언덕 밑 전부에 해당하는 너른 앞마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은 무과의 과거를 보던 연병장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위한 승마장으로 사용되었고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이곳에서 행해지곤 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맺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등마루, 속칭 ‘관덕정 말랭이’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적십자 병원 남쪽 언덕배기 처형장에서부터이다.
이 아미산 처형장은 조선 시대 군사 훈련장이었던 장대벌(봉덕동), 비산동 날뫼 뒤에 있는 큰 들인 꼬부랑개와 함께 조선시대 중죄인들을 처형하던 3대 처형장의 하나로 꼽힌다.
이곳은 원래 국사범을 공개 처형하는 곳이었으며 1864년 3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조선 시대에 대구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위치상 또는 군사상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593년 달성에 감영이 설치된 후 선조 34년(1601년)에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설치키로 확정함에 따라서 포정동(현 중앙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도내 전역의 중죄인들을 다스리는 최고 사법권을 가진 감사가 주재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각종 죄를 지은 이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 감영 부근인 서내동(西內洞)에 설치됐으며 또한 처형장들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박해 때마다 경상도 전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와서 감영 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순교를 하게 된 것이다. 관덕정과 대구 인근에서 순교한 교우의 수는 지금까지 모두 25명, 감영 옥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30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에서 20위(울산 장대 순교자 3위 포함)가 대구지역 순교자로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대구 관덕정의 정확한 위치가 고증에 의해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방치돼 왔다가 근래에 들어서야 비로소 순교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관덕정이 서 있던 위치는 아미산 아래 대구 읍성의 남문, 즉 영남 제1문(嶺南第一門) 밖의 서남쪽 200보 지점인 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의 동아 쇼핑센터 북서쪽 모퉁이 부근이다. 그리고 관덕정의 마당은 현재 적십자 병원의 전후좌우 일대와 동아 쇼핑센터 앞에서 반월당 로터리, 즉 아미산 언덕 밑 전부를 말한다.
도시청(都試廳)으로서의 용도가 필요 없게 된 1906년, 대구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관덕정을 수리하고 경상북도 교원 양성소인 사범학교를 개설했으나 폐교됐고 해방 후 완전히 헐렸다. 일제 시대에는 관덕정 마당에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와 새 장터 또는 남문 시장으로 불리다가 1937년 남문 시장이 옮겨 간 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이다. 사형 터로 고증된 병원 옆 땅 1백 55평을 확보하여 1985년 순교 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다. 순교자 기념관이 건립됨으로써 관덕정은 경상도 지역의 순교자들을 다수 배출한 순교성지의 풍모를 갖추고 수많은 순례자들을 맞게 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이 순교 기념관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의 천주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갖가지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연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함양하고 신자들의 신앙 재교육과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성 이윤일 요한제’를 기획 · 거행하고 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회의실과 강당 등을 갖춘 신관은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6년 9월 3일에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2014년 시복된 124위 중 이곳에서 순교한 11위 ‘순교 복자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4월 7일)]
관덕정 - 대구의 순교 터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老萊山,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 진보 머루산(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안동 우련밭(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교우촌 등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경상도 산간 지역으로 숨어든 초기의 교우들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은거지를 찾던 중에 교우들을 만나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그 안에서 교리를 외워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러다가 탐욕스런 밀고자 때문에 체포되었고, 신앙을 끝까지 지킨 김종한(안드레아) 등 7명은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은 뒤 관덕정 앞에서 칼날 아래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관덕정'(觀德亭,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 앞은 본래 무과를 치르던 연병장으로, 아미산에서 내려오는 산자락 끈이 냇물과 맞닿는 곳에 자리잡은 넓은 공터였다. 그 때문에 이곳은 일찍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이곳과 함께 대구의 형장으로는 장대벌(현 봉덕동)에 있던 군사 훈련장과 날뫼(현 비산동) 등이 있었는데,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은 주로 관덕정 앞이었다고 한다. 관덕정(본래의 이름은 관덕당)은 1749년(영조 25년)에 관찰사 민백상이 세웠다.
1816년 11월 1일 이곳에서 순교한 7명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관덕정 인근에 정성스럽게 매장되고 무덤마다 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그대로 형장에 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듬해 봄에 주민들 몰래 그곳으로 가서 시신들을 찾아다가 더 적당한 곳으로 옮겨 무덤 네 개에 안장하였다. 바로 이때 다음과 같이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교우들은 시신을 옮기는 일을 인근 주민들에게 들킬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 때 천주의 특별한 보호로 시체들이 묻혀 있는 읍내 쪽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하늘은 내려앉은 듯하였고,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겨우 일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빛을 발하였다. 최성렬(바르바라)의 시체만 짐승이 파먹은 듯하였으며, 나머지 6구의 시신은 조금도 썩지 않아 숨을 거둔 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이 보였다. 무덤을 파헤쳤을 때 나던 냄새도 땅 밖으로 시신을 끌어내자 이내 없어졌다. 옷가지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습기는 차 있지 않았다. 이를 본 모든 교우들은 감탄하였다("한국 천주교회사" 중, 82-83면).
1827년의 정해박해 때 경상도의 교우촌은 다시 한 번 약탈당했다. 이 때 상주 멍애목(문경군 동로면 명전리)과 앵무당(상주군 화부면 평온리) 교우촌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상주와 안동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도중에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보록(바오로) 등 6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다른 박해 때와는 달리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옥에 갇혀 있다가 바오로의 아들 박사의(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 3명만이 기해박해가 진행 중이던 1839년 5월 26일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로부터 27년이 지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경상도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우리는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한 성 이윤일(요한) 회장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충청도 홍주 출신의 유명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은 혼인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문경 여우목(문경읍 중평리)으로 옮겨 와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던 중 여우목 교우촌에도 박해 소식이 들려오게 되었지만, 요한의 가족은 순교할 원의를 품은 채 오로지 포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866년 10월,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 교우촌의 실상을 알아내고는 포졸들을 보내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포졸들이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요한은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문경을 거쳐 상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던 중에 수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요한의 마음은 오히려 굳어져만 갔으며, 상주 목사는 그를 천주교의 두목으로 지목하여 대구 감영에 보고한 뒤 그곳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그는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날 것이다.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나의 뒤를 따라오너라." 하고 당부하였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다시 형벌을 받고 관덕정 형장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 26일(양력 1867년 1월 21일)에 휘광이의 칼날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가족들은 우선 급한대로 요한의 시신을 거두어 날뫼(비산동)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훗날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인척이 살고 있던 용인 먹뱅이(용인군 이동면 묵리)의 심방골로 이장되었으며, 1976년에는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먹뱅이 심방골에 있을 당시 인근의 교우들은 그의 무덤을 '거꾸로 된 무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훗날 그 무덤을 찾기 쉽도록 시신을 거꾸로 안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의 유해는 1984년 시성식이 있은 지 2년 만인 1986년 12월 22일 미리내에서 발굴되어 대구대교구청 옆의 성모당에 안치되었다가 1990년 관덕정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