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Blane, 白圭三)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대구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임명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어 달구벌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경상도 지역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박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1882년이었고, 이때 그 전담 신부로 임명된 사람은 1877년에 입국하여 서울과 경기도 ·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즉시 경상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지 못하고 강원도에 머물며 이곳 신자들을 방문해야만 했다. 로베르 신부가 강원도를 떠나 경상도 북부 칠곡(漆谷)의 신나무골[枝川面 蓮花里]에 정착한 것은 1885년이었고, 이때부터 이곳 교우촌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1886년 대구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는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은 대구 읍내에서의 선교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183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칠곡군의 신나무골에 본당 거처를 임시로 잡았다. 그 후 대구 본당은 1887년 초에 일어난 대구 박해의 어려움을 겪은 후 1888년 장차 대구 읍내로 진출하기 위해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보좌신부에게 신나무골을 맡기고,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죽전동 · 상리동)의 죽밭골[竹田]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대구의 공소는 가장 큰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모두 6개였고, 신자수는 273명이었다.
1890년 말과 1891년 초에는 대구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로베르 신부는 일군의 불량배들로부터 행패를 당하고 경상 감사에게 시정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1891년 4월 말 교안이 마무리되면서 다시 대구에 입성한 로베르 신부는 그해 말 대어벌(현 대구시 원대동 일대)에 임시 성당을 구해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다.
성당 건립은 부지 매입 후 2년여 만인 1899년에 완료되어 그해 예수 성탄 대축일에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때 축성된 성당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에 팔각 기와지붕을 이은 그리스식 십자형으로 한국 성당 건축사에서도 유일한 양식이었다. 로베르 신부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서술했다. “대구에서 이런 축제를 한 번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1년 발생한 지진으로 제대 위의 촛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성당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로베르 신부는 새 성당 건립을 계획했는데, 이때 대구의 신자 중 서상돈(徐相燉), 김종학(金鍾學), 정규옥(鄭圭鈺) 등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1902년 5월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현 계산 성당의 원형인 새 성당은 1903년 11월 1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서 두 개의 종탑에 설치된 두 개의 종을 축성했는데, 이 종들은 기증자인 서상돈과 김절아의 세례명을 따서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부르고 있다.
새 성당의 설계를 맡은 로베르 신부는 신축을 위해 전주 전동 성당의 설계도를 입수하고, 색유리와 철물 등 공사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 주문한 뒤 서울 명동 성당을 건축했던 벽돌공, 석공, 목수 등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공사를 진척시켰다. 축성식을 가진 후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당 내부에 주교 강론대와 제단을 만드는 공사를 했고,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11일 재차 축성식을 갔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산 성당은 건축적으로 고딕식 벽돌조 건물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서쪽 정문에 세운 2개의 종탑부에는 8각형의 높은 첨탑을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 모양의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근대 초기 성당은 대개 박해시대의 순교 터나 높은 지대에 위치해 마을이나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계산 성당은 이와 달리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성당 부지 물망에 올랐던 자리는 현재의 동산동 일대였는데, 황무지인 허허벌판 언덕에 성당 터를 잡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대구 읍내 평지에 세워진 것이다.
계산 성당이 주교좌로 설정된 후 신자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우선 명도회의 창립과 명도회관의 건립, 해성 체육단(청년회) 발족, 인애회 · 친애회 · 성모회의 조직, 연령회 · 성영회 활동 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교육 사업으로는 1899년에 설립된 해성재(海星齋)가 성립학교(聖立學校)로, 다시 해성학교(海星學校, 1930년대 폐교)로 개칭되면서 발전하였으며, 1926년에는 성모 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그중 해성 청년회와 명도회는 1924년 조선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로 통합 발족된 후 대구 지역 평신도들의 중심 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전신)를 창간하여 교회 소식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계산 성당은 1910년대 이후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일제의 책동으로 1942년에는 제2대 교구장 무세(Mousset, 文濟萬)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일본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주교가 제3대 교구장에 착좌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본당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3·1 운동에 참여하거나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운동에 가담했고, 1930년대에는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으며, 꾸준히 전교 활동을 펴나갔다.
계산 성당의 신자들이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게 된 것은 해방과 6·25 동란을 겪은 뒤부터였다. 이때부터 우선 본당의 평신도 단체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새 단체들을 설립하거나 그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했다. 그리고 제10대 서정길(徐正吉, 요한) 주임신부 재임 때인 1952년에는 대성당 낙성 50주년 행사를 성대히 개최했으며, 제12대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 때는 계산 문화관 부지를 조성하고 제14대 김영환(金榮煥, 베네딕토) 신부 재임 때인 1973년에 개관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이어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벽돌로 이뤄진 성당 외벽은 물론 성당 내부 바닥의 부식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성당 설립 당시 흙모래 석회를 섞어 깔아놓은 차가운 바닥에 앉아 미사를 보는 신자들을 고려해 바닥 위에 마루를 깔았으나 마루 밑의 환기 공간 부족으로 부식이 심화됐고, 이를 막기 위해 설치한 비닐 장판마저 썩어들어가자 보수를 단행, 바닥 원형은 보존한 채 대리석을 대신 깔았다.
또한 세파에 시달려 상한 벽돌을 빼내고 대구 남산동에 있는 옛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 보수 현장에서 나온 벽돌을 가져와 복원했다. 1914년 세워진 유스티노 신학교 건축 당시 벽돌이 계산 성당 벽돌과 가장 흡사했기 때문이다.
계산 성당은 또한 교회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대 뒤편을 장식하고 있는 다섯 개의 아치형 창문이다. 건축적 아름다움도 특출하지만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화와 성모상은 성당 역사를 말해주는 유산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제대 중앙 뒤편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이 통례이지만 계산 성당은 다섯 개의 창문 중 가장 작은 가운데 창문 중앙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이는 1899년 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로베르 신부가 첫 번째 성당을 지을 때 본당 주보로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모신 역사적 사실을 상징한다. 이 성당은 불행히도 1901년 소실되었지만 본당 주보성인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제대 뒤편 중앙 창문에 루르드의 성모상을 모신 것이다.
또 성모상을 중심으로 왼쪽부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예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유리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1902년 두 번째 성당이 지어질 당시 프랑스에서 제작해 설치된 것으로 100년 이상 오색 찬연한 빛을 여전히 발하고 있다. 제대 양쪽 측면에 공관복음을 상징하는 네 개의 유리화와 성당 정문 상단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 문양의 대형 창문도 성당 건립 당시 그대로이다. 제대 양측 네 개의 창문 옆에 세워져 있는 성녀 소화 데레사 · 성 안토니오 · 예수성심 · 성 요셉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고딕식 벽돌조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간에는 여느 성당에서 보기 힘든 둥근 모양의 붉은 십자가 패 12개(12사도를 상징)가 박혀 있다. 이 십자가 패는 성당 축성식 때 크리스마 성유를 발랐던 곳인데 오랜 보존을 위해 패 뒤에 벽돌을 붙여 기둥의 벽돌과 벽돌 사이에 끼워 넣는 특이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옛 모습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성당 설립 당시 사용되던 제대는 1913년 제단 증축 공사를 하면서 걷어내 현재 관덕정 순교자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913년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까지 사용되던 제대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나무 제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벽을 향해 있던 공의회 이전 모습 그대로이며 제대 하단부 중앙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팔)가 안치되어 있다.
신자석 양옆의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화도 199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본래는 단순한 색유리만으로 이루어진 창이었으나 대구대교구의 제2 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10명의 한국 성인상을 덧붙였다.
성당 밖 마당을 둘러보아도 유서 깊은 유물이 많다. 성당 정문 앞마당 한가운데 있는 대형 십자가는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재임 1911-1938)가 교구장 부임 25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교구장 부임 25주년은 곧 교구 설정 25주년이자 계산 성당이 주교좌가 된 지 스물다섯 해 되는 해이다.
또 계산 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다. 한국식 목조 성당을 건립했지만 3년 만에 예기치 않은 화재로 성당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은 채 다시 오늘날의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대구 경북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고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2006년에는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문화관 2층에 유물 전시관을 마련하였다. 이곳에는 대어벌 임시성당에서부터 현 성당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오래된 성물,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영호남 지방 각 성당 제단체 명부 등 500여 점의 중요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2009년에는 대구시에서 추진 중인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의 하나로 성당 외벽 조명을 설치하고 성당 마당을 공원으로 조성해 열린 공간으로 변화를 꾀하였다.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권 ‘계산동 본당’과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20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