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남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가등 마을에 모셔진 순교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1844-1866년)의 묘가 확인된 것은 그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후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23세의 꽃 같은 나이로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청년 구한선 타대오. 혹독한 매질을 당한 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7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 새대[新垈] 마을 입구의 신씨(愼氏)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묻혔다. 그러나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의 묘는 고이 보전되기 어려웠고 점차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인들과 잘 알려진 순교자들은 천행으로 가족이나 친지의 배려와 증언 등을 통해 유해가 따로 모셔지거나 적어도 그 행적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려진 순교자들보다는 오히려 전혀 아무런 기록도 증언도 없이, 다만 아침 햇살이 비치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형장에서 희광이의 칼날 아래 스러진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구한선의 유해도 자칫하면 그 행적조차 묘연할 뻔했으나 천행으로 그 묘소가 확인됨으로써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순교자의 묘는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인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찬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묘를 찾던 중 대산 공소회장인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되었다.
윤 바오로 회장은 구한선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순교자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소 안에 있다.”라는 말과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 증언의 내용은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나와 그 장독(杖毒)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라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래서 신씨들의 묘소를 살펴본 결과 묘소 한쪽 구석에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결과 구한선 타대오의 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대산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외교인의 묘소 안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76년 9월 현재 위치인 평림리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구한선은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나리골은 남강 하류의 늪지대로 낙동강을 만나는 지점과 가까운 곳이라 여름이면 넘치는 물 때문에 살기를 꺼렸고 미나리꽝이 많은 곳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유학 서적과 잡서를 많이 읽고 요술로 신장(神將) 부리는 법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후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 말은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고,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참아내어 죽음 직전까지 간 그를 포졸들이 거리에 내다 버렸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한 주일 만에 장독으로 선종했다. 죽은 뒤 그의 이마 위에는 ‘품’(品)자로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때 구한선의 나이 22세. 지금 같으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고 바야흐로 사회에 첫발을 디디려는 젊은이가 눈뜨고 차마 못 볼 그 숱한 매를 한 몸에 받고, 또한 살아서 호강하지도 못하고 죽어서조차 제대로 된 묘석 하나 없는 쓸쓸한 묘소에 묻혔다.
대산 본당은 2002년 5월부터 마산교구의 대표적 순교자 중 한 명인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9월 18일 순교자 현양미사와 묘지 축복식을 갖고 인근에 주차장 등 부대시설을 갖췄다. 순교자 묘 주위로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묘 양옆에는 야외제대와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그리고 뒤에는 대형십자가를 세워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으나 성역화 10여 년 만에 묘역 바로 앞까지 공장이 들어서고 주변에 더 들어올 예정이라 소음 및 순례자들의 성지 접근성이 떨어져 이장을 걱정하게 되었다.
한편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마산교구는 시복식과 묘역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구한선 순교복자의 유해를 인근 대산 성당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2016년 5월 7일 대산 본당 설정 4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며 성지 조성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20일 묘지 이장 작업을 진행해 구한선 복자의 유해를 대산 성당 1층에 마련한 무덤 경당 제대에 모시고, 10월 29일 교구장 배기현 주교 집전으로 복자 구한선 타대오 순교성지 기념제단 봉헌식을 거행했다.
대산 성지는 본당 내 성당 1층에 복자 유해를 모신 무덤 경당과 넓은 마당에 조성한 ‘희망의 동산’에 설치된 기념제단(유해 일부 안치) 및 안내센터(어머니 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성지는 자매교구인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와의 공동기금으로 조성해 지역민에게도 열린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8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