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강원도 전래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실학(實學)의 학풍을 일으킨 남인(南人)계 선비들이 18세기 말엽에 이른바 강학회(講學會)를 연 것이 교리 탐구와 신앙 수련의 모태가 되면서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선배와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면서부터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태동하였으나 멀지 않아 거센 박해를 받게 되었다.
신해박해(1791년)와 을묘박해(1795년)에 이은 신유박해(1801년)에 이르러서는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 강원도 등의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복자 신태보 베드로(申太甫, 1769?-1839년)가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었다.
이렇게 퍼져나간 신앙에 귀의한 초기 교우들 가운데 춘천 신읍리 지방의 최 요한과 회양 지방의 성 조신철 가롤로처럼 1815년에 투옥된 이들이 있는데, 성 조신철 가롤로는 강원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들보다 늦게 1840년에는 춘천에서 신자 아홉 명이 투옥되어 그중 두 명이 옥사하기도 했다. 1880년을 전후하여 종교의 자유가 공인되기까지 강원도의 시골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힘겹게 전교에 헌신한 김 시몬 신부와 최 요한 신부도 울진과 춘천 말고개에서 각각 잡혀 모두 원주 감영에서 치명하였다.
이처럼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신자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 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다. 복자 신태보 베드로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 만의 일이었다.
풍수원 성당과 곰실 공소의 성장 당시 풍수원 본당은 춘천 · 원주 · 화천 · 양구 · 홍천 · 횡성 · 평창 · 양평 등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에 2천여 명의 교우를 관할하게 되었다. 르 메르 신부 후임으로 방인사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鄭圭夏, 1863-1943년) 신부가 1896년부터 1943년까지 48년 동안이나 2대 풍수원 주임으로 있으면서 교회는 강원도 땅에 깊이 뿌리내렸다.
풍수원 본당의 교세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이미 1896년 원주 본당 분할을 비롯하여 1920년에는 춘천(죽림동의 전신인 곰실) 본당을, 1948년에는 홍천 물구비(현 양덕원) 본당을 분할 독립시켰다. 풍수원 본당은 경성(서울) 대목구로부터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1955년 9월 20일부터는 대목구, 1962년 3월 10일부터는 교구)가 분할 · 설립되면서 춘천교구로 편입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가 춘천교구로부터 갈라져 나가면서 이번에는 원주교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춘성군 동내면 고은리 곰실 공소는 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곰실 공소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였다.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엄주언의 딸 엄 루치아의 증언이나 1894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중에서 ‘목’씨 성을 가진 신부는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브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했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주경야독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곰실 본당의 춘천 진출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 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 방문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그 후 1938년 제5대 유영근 요한 신부까지 방인사제가 주임을 맡다가 같은 해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고, 곧이어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맡고 있던 서울(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자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초대 지목구장으로 당시 광주 지목구장인 오원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겸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활동을 하지 못한 채 얼마 후 춘천 본당 제6대 주임으로 있던 퀸란(Thomas F. Quinlan, 具仁蘭) 신부를 대리로 임명했다.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제2대 지목구장이 되었다.
1938년 10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도토리밭을 매입해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1950년에 죽림동 본당으로 개명하였다.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춘천교구를 맡아 1994년에 제6대 교구장 장익(張益) 요한 주교가 부임하기까지 모두 55년간 사목하였다.
새 성당 건립 현재의 죽림동(竹林洞) 주교좌성당은 김유룡 신부와 엄주언 회장이 이끈 곰실 교우들이 애써 마련한 아랫터에 보태어 퀸란 토마스 신부가 매입한 언덕 위에 서게 되었는데, 그 기공식은 성당 벽에 라틴어로 붙어있는 초석이 말하듯이 1949년 4월 5일에 있었다. 새 성당의 건립은 퀸란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한 지 2년 후인 1941년에 감목 대리직을 맡으면서 계획해 오던 것이지만 일제 치하의 외국인 구금 및 연금으로 착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 다시 복직한 퀸란 신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로 건립을 미루다가 다행히 미군 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 본격적으로 착공하게 되었다.
실제 건축 작업은 전남 광주에서 온 ‘자’씨 성의 한 화교 기술자와 또 한 사람의 기술자가 맡았다. 석재는 멀리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날라다 썼다. 그러나 거의 한 해 동안 돌로 외벽을 훌륭하게 다 쌓고 동판 지붕까지 덮고 나서 내부 공사에 들어갈 때 6.25 전쟁이 터졌다.
성당 파괴와 납북 기막힌 전란이 터지자 춘천시에서는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퀸란 토마스 지목구장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가 지켜보는 앞에서 캐나반(Canavan, 孫) 보좌신부와 함께 체포해 연행해 갔다. 그 후 소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어 교황사절 번(J. Patrick Byrne, 方溢恩)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로 끌려가 강제 수용되었는데, 캐나반 신부도 번 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에는 퀸란 토마스 신부와 크로스비 필립보(Philip Crosbie, 趙) 신부도 있었다. 그리고 라 파트리치오 신부, 고 안토니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는 모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되었다. 이렇게 6.25 전쟁 중에 순교하거나 납북된 후 모진 고생 끝에 살아 돌아와 선종한 성직자들의 시신은 죽림동 성당 뒷마당의 교구 순교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이밖에도 춘천 지목구에서는 6.25 전쟁을 전후로 평강 본당의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가 연행되어 옥사했고, 의주 본당의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소양로 본당의 콜리어(Collier, 高) 신부와 홍천 본당의 크로스비(P. Crosbie, 趙) 신부도 퀸란 지목구장 신부와 함께 죽음의 행진을 했다.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의 남하를 헌신적으로 돕던 양양 본당의 이광재 티모테오(李光在, 1909-1950년) 신부 또한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다.
처참한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3일부터 중공군이 밀물처럼 쳐들어오자 국군은 이른바 1.4 후퇴라는 참패를 당했고, 5월에는 유엔군의 반격이 있었는데 그 작전 중의 공습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짓다 만 죽림동 새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이 대파되었다.
성당 복구와 완공 이 와중에서도 1951년 8월에 제1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Comerford, 孔)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했다. 복구 준비는 한참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비교적 잘 진전되어 1953년에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한편 수용소에서 살아온 퀸란 신부는 그곳에서 순교한 번 주교의 뒤를 이어 한동안(1953-1957년) 교황사절 서리를 겸하였다.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퀸란 신부는 11월 23일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 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성당의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주교좌성당 중창(重創) 모두가 힘을 모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파괴된 성당을 복구하고 훌륭하게 완공했지만 4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크게 보수할 필요성이 생겼다. 누수로 삭아가는 지붕과 천장, 녹이 슨 창틀과 꺼지는 마루, 뒤틀린 문틀, 누전 위험이 큰 배선 등 견고한 석조 벽채를 제외하고는 가벼운 개보수를 넘어 총체적 중창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춘천교구는 2000년 대희년과 교구 설정 60주년이라는 성숙과 도약의 뜻깊은 해를 앞두고 교구의 상징이자 중심인 죽림동 예수성심 주교좌성당의 모습을 일신하여 새 천년기에 들어서려는 계획을 세웠다. 1994년 12월 14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춘천 교구장에 착좌한 장익 요한 주교는 죽림동 본당 제22대 주임 이정행 요한 신부와 함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많은 이들의 협조와 가톨릭 미술가회 소속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여로 1998년 4월부터 다섯 달에 걸쳐 성당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전례 거행에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성당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중창 축복식을 거행했다. 또한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주교좌성당의 기초를 놓은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의 공적을 기리고 전교 사업을 목적으로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을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건립해 ‘말딩회관’(사제관 포함)이란 이름으로 1999년 4월 24일 축복식을 가졌다.
주교좌성당 성역화와 성지 선포 죽림동 주교좌성당은 2003년 6월 2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11월 21일 말딩회관 내에 본당 설립 100주년(2020년)을 앞두고 마련한 역사전시실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13년 6월 14일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기공식을 하고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1일 축복식을 거행했다.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은 성전이 지닌 역사와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근현대 신앙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으로, 성 골롬반 의원 폐원과 성 골롬반 수녀원 이전으로 확보된 성당 앞 부지에 전정 · 중정 · 회랑 등을 지어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4년 6월 1일에는 교구 주보이자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오광섭 작)을 새로 제작하여 시내 중심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성당 입구 언덕 위에 설치하고 축복식을 올렸다. 이는 청동 소재로 된 예수성심상 중에서 국내 최대 규모이다.
그리고 2017년 9월 17일 춘천교구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는 6·25전쟁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교구 순교자 묘역과 모든 사제의 모범인 이광재 디모테오 순교자가 마지막까지 사목하던 양양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당 두 곳을 성지로 선포했다. 춘천교구 순교자 묘역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인 동시에, 신앙을 증거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다가 희생된 6·25전쟁 순교자들이 함께 모셔진 곳이다.
이 순교자 묘역에는 ‘죽음의 행진’ 속에서 살아남아 교황사절을 지내며 춘천교구의 첫 교구장을 맡아 교구의 초석을 놓은 구인란 토마스 주교의 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당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고 안토니오(Antony Collier) 신부,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있고, 북한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이광재 티모테오, 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들 중 앤서니 콜리어 · 패트릭 라일리 · 제임스 매긴 · 백응만 · 김교명 · 이광재 신부는 현재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출처 : 죽림동 성당 홈페이지 내용과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4년 11월 16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미사시간 안내 | |||
---|---|---|---|
미사구분 | 요일 | 시간 | 기타사항 |
주일미사 | 일 | 07:00 | |
09:00 | 학생미사 | ||
11:00 | 교중미사 | ||
19:00 | |||
21:00 | |||
평일미사 | 월 | 06:00 | |
화 | 19:00 | ||
수 | 06:00 | ||
19:00 | |||
목 | 06:00 | ||
19:00 | |||
금 | 06:00 | ||
19:00 | |||
토 | 06:00 | ||
16:00 | 어린이미사 | ||
19:00 | 주일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