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곳이 순교성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 창립(1784년)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 신부를 잃은 지 30년 만인 1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돼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을 얻은 데 이어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그 후 1년 만에 조선 교회는 신자가 9천 명으로 늘어났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839년 기해박해는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38년 전 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새남터, 당고개와 용산의 사적지
한국의 순교 성지나 사적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곳만을 따로 떼어 내 설명하기란 어렵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순교터인 새남터, 서소문, 절두산, 그리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노고산, 삼성산, 왜고개, 용산 신학교, 명동 대성당 등이 순교자들의 유해 이장과 관련하여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용산 일대는 새남터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성지와 사적지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까지 수목이 울창했던 이곳은 '용산 8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 선풍이 일게 되면서 용산 일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요람지인 신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함벽정(涵碧亭, 현 원효로 성심여고 위치) 터에 마련된 예수 성심 신학교와 예수 성심 성당(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또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언덕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까지 그 복음의 끈이 이어져 오고 있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자로는 사남기(沙南基) 또는 노량사장(鷺梁沙場)으로 표기되어 왔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미 1890년부터 이곳의 순교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 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 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현재 한식의 새남터 성당이 들어서 있는 곳이 바로 이 자리다. 이 새남터의 북쪽 공터는 일찍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조선 후기까지 숲이 울창하였다. 따라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는 중죄인인 경우에는 서소문 밖 대신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 모반죄로 처형된 남이(南怡) 장군의 형 집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새남터가 천주교 순교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형을 당한 때부터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맞이해 들인 최초의 성직자 주문모 신부. 그러므로 그의 최후를 지켜본 신자들은 훗날 그의 성덕을 기리면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놓은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래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81행; 신미년(1811년)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함께 어우러진 형장의 모습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재현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한 것이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와 마찬가지로 군문효수를 당해 그 머리가 장대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 시신은 3일 동안 백사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러나 20일 후 용감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시신이 수습되어 노고산(老姑山, 마포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런 뒤에도 새남터의 북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1846년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성 현석문(가롤로)이 다시 망나니의 칼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모두 6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우세영(알렉시오), 정의배(마르코)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 중에서 정의배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고, 나머지 시신은 신자들이 거두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한편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는 당고개(堂峴, 원효로 2가의 문배산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망나니들의 칼날이 10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본래 이곳은 형지가 아니었지만, 상인들이 닥쳐 올 설날 대목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주도록 요청한 때문이었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9명은 훗날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이제 당고개는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근래에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 성지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의 의미를 깨우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순교 성지 새남터와 당고개는 이렇게 창조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북소리가 이곳을 찾아 순례하는 신앙인들의 마음 안에서 울리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곳에서 처음 순교한 주문모 신부가 초기의 순교자들과 함께 훗날의 시복 시성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 후손들의 순례가 계속되고 그분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한 시성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