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구역으로 분명히 안양시 안양 9동, 시 중심가에서 불과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첩첩 산중이 나선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 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현재 담배골 부근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옛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50여 미터만 올라가면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2008년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고택 왼편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의 묘역이 나온다. 성인 묘역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동굴 성모상과 야외미사터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23일)]
수리산, 골배마실, 은이 -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830년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교우촌으로 가꾸어진 수리산(修理山, 안양시 안양 3동의 뒤뜸이 마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성장한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과 이웃 '숨은 이들의 마을' 은이(隱里) 교우촌. 이 두 지역은 경기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교우촌이자 카타콤바와 같은 박해 시대의 비밀 교회로서 신앙을 이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1836년 초 수리산에서는 최양업이 교우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얼마 뒤에는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수리산이나 골배마실 골짜기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신자들 대부분이 화전이나 담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새 신자들을 환영하였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신부의 방문이 있을 때면 여럿이 모은 공소전(公所錢)을 바쳐 교회 사업을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은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의 회장 최경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태연히 그들을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무지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은 뒤 그 상처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모친 마리아는 두 살짜리 막내 자식에 대한 육정(肉情, 모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친 뒤 끊어지는 육정을 억누른 채 순교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의 배교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정과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복 과정에서는 마땅히 마리아를 다시 '하느님의 종'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최경환과 김제준이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수리산 자락과 골배마실 인근에 각각 안장되었다. 그러나 최경환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온 반면에 김제준의 무덤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최경환의 유해는 1930년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본래 무덤 자리와 교우촌은 1965년부터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또 골배마실에는 1962년 양지 본당 신자들에 의해 김대건 신부상이 건립되었고, 은이 공소 터는 최근에 일부가 매입되어 사적지로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교우촌 수리산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이래 끊임없이 지방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때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가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이천의 '동산밑'(경기도 이천시 동산리) 출신으로 춧날 천주가사 "옥중제성"(獄中提醒)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교우촌 중에서 유명한 수리산(修理山, 경기도 안양시 안양 4동의 담배촌)과 골배마실(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이 들어있었다.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1970년대까지도 그 앞으로는 수리산 자락의 뒤뜸이 마을과 좁은 입구로 가려진 병목 안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수리산 교우촌의 중심지인 뒤뜸이는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는데, 신자들이 새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새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탓에 담배촌으로도 불리었다.
이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1837년경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이보다 훨씬 전인 1832년경에 성 최경환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생각된다. 최경환은 1804년 충청도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세 살 위인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18세 때인 1821년에 아들 최양업을 얻은 뒤 형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낙동(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거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이곳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게 되었다.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