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소속 본당. 경남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422소재. 1926년 12월 5일 부산(현 범일)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그리스도 왕.
전사 및 공소 시대 일설에는 이 지역 출신 오한우(베드로)가 1790년에 영세한 뒤 신유박해 때 충청도 지역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백지사(白紙死)를 당했으며, 오한우와 같이 영세한 김교희가 박해를 피해 내간월 불당골(佛堂谷, 현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그리하여 언양 지역에는 이미 1800년대 초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교회 측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또 백지사가 병인박해 와서야 비로소 시행된 사형의 한 방법이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그 근거는 매우 희박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지역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金在權, 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이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하였으며,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가 방문하여 차례로 공소를 치르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죽림골),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는 김사집(필립보)으로, 그는 1866년 11월 진영 포졸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5월(음력)에 순교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이어 언양 대재[竹嶺] 교우촌에 살던 허인백(許仁伯, 야고보), 김종륜(金宗倫, 루카), 이양등(李陽登, 베드로) 등 3명이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에 체포되어 울산장대(將臺)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뒤 교우촌이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현 계산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A. P. Robert, 金保祿) 신부가 1883년에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의 신자수는 38명이었다.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되었다. 이 지역은 조조(M. 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 부산 절영도에 정착하여 부산(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을 설립하게 되면서 새 본당 소속이 되었다. 그 후 1898년 1월경 명례 임시 본당(현 밀양 본당)으로 잠시 이관되었다가 1901년에 부산 본당 관할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1904년 6대 주임 르 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신부 때에는 살티 공소 · 언양읍 공소 외에 순정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 세 공소의 신자수는 153명에 달하였다.
본당 설립과 발전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박우양(朴遇陽, 가브리엘) · 김문익(金文益, 안드레아)을 비롯한 이 지역 신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6년 12월 5일 언양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E. Beaudevin, 丁道平)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듬해 4월 4일 정식 임명을 받고 5월 14일 본당에 부임한 보드뱅 신부는 부임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40년 10월에 성가대, 1952년 8월에는 성모회가 조직되었다.
1954년 1월에 ‘소화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56년 4월에는 울산(현 복산) 본당을 분리하고 356명의 교적을 이관하였다. 1957년에 강당을 마련하였고, 1962년에 성모상을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삼정 · 유촌 · 중리 · 소호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1974년 8월 25일 ‘안나 유치원’(옛 소화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1976년 11월 5일에는 수녀원을 완공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79년 11월 18일 세 명의 동정녀가 기증한 부지에 기증자의 이름을 따 ‘안나 데레사 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81년 5월 24일에는 신용 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1986년 11월 9일에는 죽림굴 사적지를 발견하였으며, 1989년 7월 20일에는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4일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유물 전시관’을 개관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건립되어 봉헌식을 가진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성당 뒷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으로 벽을 구성하여 들어서는 순간 시원한 냉기가 감돈다.
언양 성당은 또한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하였다. 또한 부산교구 내에서 가장 많은 5개의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성당과 신앙유물 전시관은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성당 마당에서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오한우의 증손자)의 묘소가 나온다. 또 2010년 대형 돌에 새겨 설치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따라 기도하며 화장산(花藏山) 정상 부근에 오르면 언양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있다. 언양 성당에는 지역의 성지와 사적지를 소개하는 성지 안내원이 있다. 미리 연락을 하여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성지를 돌아본다면 매우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신앙유물 전시관 언양 성당과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신앙유물 전시관은 성당과 같은 형태의 석조슬레이트 건물이며 지하 1층, 지상 2층의 45평 건물로서 경사지에 지어져 반지하를 갖고 있다. 1936년부터 본당 사제관으로 사용되어 온 곳으로 1층은 주방, 2층은 신부님의 개인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예법이 엄격해서 식복사와 직접 만나는 것을 피하여, 물건이나 식사의 연결은 필요할 때마다 작은 종을 울려 의사표시를 하고 도르래를 움직여 1층과 2층간에 물건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언양 지역 천주교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1990년 12월 4일 신앙유물 전시관으로 개관한 이곳은 신앙유물과 민속유물 등 총 70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신앙유물은 교황청에 등록된 귀중한 자료들이다. 한번쯤 꼭 확인해 볼 유물로는 언양 천주공교협회 등 본당 단체들이 남긴 기록, 1800년대 초기의 독특한 성모상인 19cm 높이의 천상 모후상, 초기 천주교 포교 서적, 교리서, 성가책, 미사와 전례에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 해골이 새겨진 독특한 형식의 십자가들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앵베르(Imbert) 주교, 성 샤스탕(Chastan) 신부의 유해 등이 있다.
2층에는 민속유물로 선조들이 생활필수품으로 사용했던 물레, 절구통, 구유, 은비녀 등의 민속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건물 안팎이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종교적 ·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건물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12시, 오후 2-5시까지다. [출처 :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들풀 바람 그리고 - 울산의 성지를 찾아서, 2010년,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