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산(795m)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노래리에 있다. 이 지방에는 1775-1785년 음력 1월까지 10년 동안 수덕자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선생이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칠극”(七克)에 의한 천주교 수계생활(守誡生活)을 함으로써 복음의 씨가 뿌려졌고,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후 상주의 이안면 · 배모기 등 몇몇 곳에 복음의 씨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이 다른 지방에 비해 폐쇄적이며 불교와 유교가 대단히 성행했던 지방이라 좀처럼 복음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직 복음이 크게 전파되지 않아서 관헌들의 박해의 손길도 그다지 뻗치지 않았고, 또한 경상도 동북부가 험한 산악지대가 많았던 지리적 이유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숨어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태백산맥의 높고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1219m) 가운데 있는 봉화의 우련전(우련밭), 영양의 곧은정 등지에는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이때 신유박해의 손길이 뻗쳤던 상주의 배모기, 은재 등지에 살던 신자들도 문경의 한실과 청송의 노래산 등지로 피난을 와서 다른 지방에서 온 신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유박해 중에 관청에 체포되었으나 죽음을 면한 신자들이 경상도의 언양(강이문), 김해(이학규), 고성(신흥권) 등지로 귀양을 감에 따라 이들 지방에도 자연히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결국 정치적 갈등과 당쟁이 큰 구실이 되어 일어난 이 박해로 300명 이상의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하는 처참한 지경에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이 박해로 인해 경상도 지방에는 복음의 씨앗이 점차 확산 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송군은 경상북도의 중동부 지역에 위치하며, 한반도의 동해안 쪽으로 치우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들이 많은 산악지대이다. 특별히 안덕면에 있는 노래산은 “산의 형세가 네 신선(神仙)이 걸어가는 발모양 같이 생겨 늙은 보래(神仙)들이 오는 곳”이라 해서 노래산(老萊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 후에 충청도의 홍주 · 청양 · 덕산 고을 및 전라도와 경상도 상주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다. 증언자 윤순용 씨에 따르면 당시 30여 호에 살던 신자들이 높은 산꼭대기의 분화구처럼 생긴 이곳에서 16만 평의 넓은 산지를 개간해서 화전(火田)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을 하면서 산 아래 있는 외교인들과는 일체 접촉을 하지 않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옛날 임진왜란(1592년) 때의 피난지로서 재상 유성룡(柳成龍)의 형인 겸암(謙唵) 유운룡(柳雲龍, 1539-1601년)이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왜군을 물리쳐 유명한 ‘겸암비결’이 일어났던 곳이다. 유운룡은 노래산 뿔각전에서 새로운 병법을 익혀 임진왜란 때 사용을 했다고 한다. 신자들도 아마 이곳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것을 알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것 같다.
신자들은 15년 동안 거의 흉년을 모르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1814년 전국적인 대흉년이 들어 가을 추수가 거의 허사가 되자 이듬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경상도 지방은 수해까지 겹쳐서 더욱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전부터 자주 노래산 교우촌을 드나들며 고기장사를 하기도 하고, 반(半)걸인으로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던 전지수란 사람이 빈궁으로 인해 신자들로부터 받는 애긍이 줄어들자, 구걸로 받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자들을 밀고하여 오죽잖은 재물마저도 빼앗을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청송현의 관장에게 가서 신자들이 노래산에 산다는 사실을 알리고,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이 함께 모여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있을 때 길잡이가 되어 경주 포졸들과 함께 들이닥쳐 신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청송의 상부관청인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으로 인해 배교하기도 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고문과 굶주림으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기도 전에 옥사하기도 했다. 결국 대구 감영까지 이송된 신자들 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여 사형언도를 받고 집행 때까지 남은 신자는 노래산의 고성대 베드로(高聖大, ?-1816년) · 고성운 요셉(高聖云, ?-1816년) · 김화춘 야고보(金~, ?-1816년) · 구성열 바르바라(具性悅, 1776?-1816년)와 진보 머루산의 이시임 안나(李時壬, 1782-1816년), 영양 곧은정의 김희성 프란치스코(金稀成, 1765-1816년), 영양 우련전의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등 모두 7명이었다. 이들은 대구 감영에서 17개월 가까이 옥살이를 하다가 1816년(병자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기적적으로 친척들과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무덤 네 개에 함께 안장되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노래산의 교우촌은 없어지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칠곡 신나무골과 영천, 안동, 길안, 경주 진목정, 경산 구룡마을, 언양 등지로 옮겨간 듯하다. 오늘날 노래산 교우촌 터(노래리 615번지) 주변에는 2007년 3월 9일 청송 양수발전소가 준공되었다. 양수발전을 위한 청송호의 상부댐(노래호)이 노래산 정상 밑으로 건설되면서 교우촌 자리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현재 교우촌 터 추정지 일대를 신흥종교가 소유하고 있어 순례 또한 쉽지 않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