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上乃里)에 위치한 한실 교우촌은 백화산(1063m) 서북부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한실 뒷산을 넘으면 바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 성지와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뇌정산(991m), 오른쪽은 문경 새재와 조령산(1017m)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자연적인 요새의 특성을 갖추었기에 임진왜란 때 피난처가 되었고 박해 시대에는 은신처가 되어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 한실에 처음으로 신자들이 들어온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상주 이안면 배모기에 살던 서광수(徐光修, 1715-1786년)의 넷째아들인 서유도(徐有道, 1772-1837년)의 가족들이 이곳 한실 잣골로 피난을 오면서부터로 생각된다. 그리고 1812년과 1813년에 충청도 홍주와 연산의 황 바오로, 원 베드로 등 신자 몇몇이 공주에서 순교할 때 경상도에서도 사사로운 군란이 있어, 이곳 한실에 피난 와서 살던 서유도의 부인 전주 이씨가 순교했다고 한다.
한실 교우촌은 경상북도의 사도로 불리는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가 병인박해 때 백화산을 넘어 문경과 연풍 등을 다니면서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목의 중심지였다. 칼래 신부는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의 건학, 여우목, 사실 교우촌과 백화산 너머 연풍 등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했다.
칼래 신부가 병인박해 직전에 한실 인근의 건학(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교우촌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 마침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 여우목의 공소회장 이윤일의 아들 이 시몬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 옥중에서 교살되어 순교한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부인과 아들이 미사에 참례하고 순교자들을 위해서 미사를 청했다. 그리고 이내 병인박해가 인근 교우촌으로 퍼지자 칼레 신부는 한실을 중심으로 문경과 백화산을 넘어 연풍 등지로 쫓겨 다니면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병인박해 때 이곳의 많은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 진영 옥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金禮己) · 김인기(金仁己) 회장 형제는 신자들의 괴수라 하여 여우목 공소에서 체포되어 온 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 회장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 · 정리하여 1895년에 간행한 “치명일기”(致命日記)의 순교자 명단을 보면 병인박해 당시 한실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한 15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태순 베드로(徐泰淳, 1823-1867년), 김 아우구스티노, 김 토마스, 또 다른 김 아우구스티노. 김 안토니오, 김 베네딕토, 김 빈첸시오, 김 프란치스코, 김 생원, 또 다른 김 생원, 장 서방, 장 서방 부인, 김 요셉, 김 베드로, 모 막달레나. 이들의 순교 이후 한실 교우촌은 점점 쇠퇴해갔다.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9월 12일 상주시 함창읍 나한리의 한 논두렁에서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의 묘소를 발굴해 유해와 묘소 흙 등을 옹관에 담아 한실에 새로 조성한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형수인 순교자 박 루치아의 가묘도 조성하였다. 서유형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였던 서광수의 친척으로 문경시 산양면 평지리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5년 10월 부인 성재추 막달레나, 7세 된 딸과 아들 순보(3세), 하인, 형수 박 루치아 등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서유형과 그의 형수인 박 루치아는 1866년 겨울 상주 옥에서 순교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