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고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까지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km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당시 고국 땅을 밟은 김 신부의 감회가 사뭇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 떼였고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분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었다.
목자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양 떼들에게 세 분 성직자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김대건 신부 자신도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고국에서 첫 방인 사제로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길을 떠났던 조선인 선원들과 두 분 성직자를 모신 김대건 신부는 첫 방인 신부로 나바위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비록 고국에서의 사목 활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총명함과 굳건한 신앙은 한국 교회의 가장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시작하여 1907년에 완성하였다. 설계는 명동 성당 설계자인 프와넬(Poisnel) 신부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으로 벽돌을 쌓아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그리고 1922년 회랑 기둥 아랫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7월 18일 ‘화산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때는 화산 성당이라 불렀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을 따라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1997년 1백주년을 맞은 나바위 성당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 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다. 당시 본당 주임인 김후상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일념으로 피신하지 않고 미사를 계속 봉헌했다.
나바위 성지에는 화산 북쪽 암벽에 금강을 바라보고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나바위 성당이 설립되기 전 금강을 오르내리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암벽 위 암반에는 1912년부터 매년 6월이면 이곳에서 피정을 하던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를 위해 베르모렐 신부가 지은 망금정(望錦亭)이 있다.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에 세운 화강석으로 만든 4.5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다.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와 똑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성당 뒤편에는 야외제대와 평화의 모후 성모동산이 꾸며져 있고, 화산으로 오르는 오른쪽 입구에는 2007년 9월 봉헌된 김대건 신부 성상이 서 있고, 성모동산 왼쪽으로 정상까지 이르는 길에서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와 2대 본당신부였던 소세(Saucet) 신부의 묘가 있다.
성당 내부에는 1995년 전주 교구청에서 옮겨온 성 김대건 신부의 성해(목뼈) 일부가 모셔져 있다. 제대와 그 위의 예수성심상, 촛대, 감실, 세례대 등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성당 건축 당시 들여와 조립 또는 설치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991년에는 2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 또 피정의 집 앞에는 주차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2천 평 규모의 너른 운동장이 있어서 야영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2011년에는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