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땅에 복음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이래 1백여 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들의 피와 땀은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려져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을 계기로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었던 당시 조선 땅에서는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이를 없었던 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지방 관리나 유림들에 의해 빈발했고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지방 관리와 교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교인들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예컨대 충청도 아산, 전라도의 지도(智島), 황해도의 장연(長淵), 강원도의 이천(伊川) 등지에서는 계속적인 교난 사건이 발생했다.
즉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다. 이 사건은 제주에서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교안으로 신자 수백 명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민군(民軍)에 의해 피살되었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새로운 조세 정책, 즉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어 가는 것에 불만을 가진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현재 제주시의 중심부인 삼도 2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덕정(觀德亭)은 본래 조선 초 세종 30년(1448년)에 목사 신숙청(申淑晴)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亭子)이다. 관덕정의 편액(扁額)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필치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었고, 현존하는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쓴 것이다. 관덕정은 제주도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제주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이 정자를 처참한 사형장으로 만들었다. 저항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천주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다. 특히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 광장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의 신자가 피살된 것으로 보았으나 당시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제주 지역의 선교를 맡았던 라크루(Lacrouts) 신부는 프랑스 함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관덕정에는 시체들이 즐비했었다. 1901년 당시 프랑스 함대장이 찍은 사진에는 교우들을 때려죽일 때 사용했던 몽둥이들이 시신 옆에 함께 놓여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신축교안으로 관덕정 등지에서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別刀峯)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했고, 그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가고 무연고 시신들만 남게 되었다. 1902년 8월 제주를 방문한 뮈텔(Mutel) 주교는 매장지 확보를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 과정에서 피살자의 묘지인 영장지(營葬地) 문제가 1903년 11월 17일 최종 타결되어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하게 되었다.
1997년 ‘신축교안’을 재조명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는 제주교구는 2003년 11월 7일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함께 화해 선언문을 채택함으로써 100년 동안 평행선을 달려왔던 양측이 과거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화해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화해 선언문 발표로 교회는 과거 전통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점들을 인정하고, 제주도 민중들도 봉기 과정에서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일방적 시각을 버리고 해묵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6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