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본당.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봉담면(峰潭面) 왕림리(旺林里) 252 소재. 1888년 7월 본당으로 설정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비봉면, 팔탄면 일부 지역.
전사 및 공소 시대 갓등이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이 언제였고, 또 언제부터 그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는가는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가 남긴 1839년 1월 25일 일기에 ‘갓등이 공소’의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1839년 이전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을 전후하여 갓등이 공소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그들이 살던 지방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76년부터 선교사들의 입국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갓등이 지방 역시 교우촌이 다시 형성되었을 것이며, 1881-1882년도 경기도 지역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수원 지방에 갓등이 · 건이 · 느지지 · 양간 등 4개 공소가 있었다. 신자수는 건이가 105명으로 제일 많고, 갓등이는 102명, 느지지는 47명이었다.
갓등이 지역을 포함하여 한강 이남 경기도 지역을 담당한 최초의 선교사는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로, 1883년부터 그가 파리 본부로 전임되기 전인 1885년까지 3년 간 갓등이 지방의 공소를 방문하고 판공 성사를 주었다. 이후 푸아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혼자 맡아보다가, 1888년 7월 앙드레(J. Andre, 安學古) 야고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한강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본당 설립 및 발전 1889년 앙드레 신부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 성당을 지었으며, 관할 구역은 수원군(현 화성군), 용인군, 안성군, 평택군 등 4개 군에 공소는 24개, 신자수는 1,790명에 달하였다. 1890년 4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알릭스(J. Alix, 韓若瑟) 요셉 신부는 부임 직후 본당 주보를 ‘예수 성심’으로 명명했으며, 같은 해 9월 기존의 초가 성당을 증개축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한문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후 삼덕학교는 신명의숙(神明義熟, 1914), 왕림학원(旺林學院, 1933), 왕림강습소(1938), 봉담고등공민학교(1950), 광성초등학교(1955) 등으로 학교 이름이 바뀌는 가운데 지역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교세의 확장으로 1896년 4월 미리내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고, 이듬해 알릭스 신부가 일시 귀국함에 따라 페네(Peynet, 裵嘉祿) 가롤로 신부와 이종국 신부가 임시로 본당 주임을 맡기도 하였다.
1900년 3월 다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알릭스 신부는 다음해 33칸의 기와집 성당 및 한옥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03년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06년 북수동(北水洞) 성당을 분리 · 설정하였다. 1911년 5대 주임으로 부임한 르 각(Le Gac, 郭元良) 가롤로 신부는 3년 간 열심히 전교하였지만 1914년 그만 장티푸스에 걸려 선종하고 말았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 때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17년 왕림 본당은 69개 공소에 신자수는 2,700여 명이 되었다. 1927년 10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최초로 본당에 파견됨으로써 본당의 전교 활동은 더욱 수월해졌다. 그리고 8대 주임으로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을 당시 본당은 일제의 탄압으로 왕림학원이 폐쇄되고 서당이 개설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1938년 8월 왕림강습소로 인가받아 교육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 광성국민학교를 인가받아 본당 주임 신부가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9대 주임 임종구(林鍾求) 바오로 신부 때인 1949년 성당이 증축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학교와 성당이 점령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0대 주임 임응승(林應承) 요한 신부 때인 1957년 6월 발안(發安)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다. 1961년 10월 남양(南陽) 본당이 분리 · 설정되었으며, 1963년 수원교구의 설정과 함께 본당이 수원교구로 편입되었다.
13대 주임 강주희(姜周熙) 판크라시오 신부 때인 1969년 11월 학교 자활 사업을 위한 양전을 조성하였으며, 1971년 4월 순교자의 모후 소년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다. 그 해 11월 현대식 새 성당을 지어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구 성당 철거 자재로 비봉면 청요리 공소를 신축하였다. 14대 주임 김효신(金孝臣) 마티아 신부 때인 1973년 창조주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각각 창설되었다. 16대 주임으로 부임한 하재별(河在別) 미카엘 신부 때인 1975년 8월 33평의 사제관이 신축되었고, 정남(正南)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다. 17대 주임 정해성(丁海星)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는 여러 사목 조직들을 결성하였고 수녀원 신축 및 성당의 진입로를 정비하는 등 본당의 활성화와 환경을 정비하였다.
18대 주임 최재필(崔在弼) 안드레아 신부 때 본당에 파견되어 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철수한 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분원이 마련되었다. 1985년 10월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 성전 및 사제관과 수녀원을 기공하였으며, 1987년 1월 본당 설정 100주년 본당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19대 주임 이찬종(李贊鍾) 요셉 신부 때는 성당 주변 콘크리트 공사와 성당 지붕 공사를 하는 등 성당 주변 환경이 정비되었으며, 1988년 11월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화보집이 발간되었고, 11월 1일에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식 및 성당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집(1)이 간행되었다.
23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용삼 신부는 2000년 4월 새 가족 찾기 운동 선포식을 갖고 가두 선교를 실시하는 등 신자 모집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2001년 3월 십자가상과 십사처상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 5월 성당 울타리 공사와 11월에 성당 의자를 보수하는 등 활발한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다. [출처 : 백병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에서 발췌]
왕림을 상징하는 ‘갓등이’는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사제를 의미하며, 박해시대에 왕림 교우들이 사용하던 은어이다. 종현(현재의 명동, 1882년 설립), 원산(1887년 설립) 본당에 이어 한국 교회의 세 번째 본당이자 수원교구의 뿌리인 왕림 본당은 조선시대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선교사들이 충청도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교회사적지로서 의미가 깊은 왕림 성당 일대는 현재 가히 ‘신앙 벨트’라 부를 만하다. 성당을 중심으로 수원 가톨릭대학교, 한국 외방선교회 신학원, 천주 섭리 수녀회, 위로의 성모 수녀회 수련소, 그리스도 사상 연구소 등 교회 기관이 2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또 성당 옆에 ‘박물관’ 간판을 내건 건물이 있는데, 초기교회 전례용품과 제대, 묵주 등 5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2008년 11월 16일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수원 가톨릭대학교 운동장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