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윤일 요한(李尹一, 1816-1867년)은 1812년 홍주(현 홍성)의 열심한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1865년 12월 고향을 떠나 경남 상주 갈골로 이주했다가, 부친이 별세한 후에는 문경 여우목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30여 호를 입교시키는 등 공소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 하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마을을 습격한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태연하게 “내가 바로 천주교 신자요”라고 대답한 뒤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 3일 동안 심한 형벌을 받은 다음,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2개월간 수차례의 심한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고 도리어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하는 한편 함께 갇힌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결국 그는 사학의 괴수로 지목되어 1867년 1월 4일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로 압송되어, 그해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 관덕정으로 끌려나가, 마지막 음식을 든 뒤 주머니에서 돈 몇 푼을 꺼내 희광이에게 주면서 단칼에 베여달라고 부탁한 후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관덕정 형장 근처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후 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가족들에 의해 대구 비산동(날뫼)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면서 당시 용인시 이동면 묵 1리 먹뱅이에 살고 있던 그의 동생 이시영 씨에 의해 1912년 이곳 묵리 산 32-1로 이장되었다.
그 후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가, 대구대교구와 이원순 교수를 비롯한 교회사가들의 연구로 이윤일 성인의 유해임이 밝혀져, 1987년 1월 21일 이문희 대주교가 성인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대구 성모당으로 옮겨 안치하고 대구대교구 제2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다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그는 1968년 순교 복자로, 1984년 5월 6일 103위 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순교사적지를 관리하는 천리요셉 성당은 2008년 9월 28일 최덕기 주교 주례로 성 이윤일 요한 묘소 축복식을 가졌다. 이윤일 성인이 64년간 묻혔던 묘 주위로 본당과 고 김진용 마티아 씨 등이 마련한 성모상과 야외제대가 있고, 그 옆에 이곳이 성인의 유해를 모셨던 거룩한 곳임을 알리고 성인의 신앙을 배우고 전하기 위해 대구대교구 이문희 주교가 세운 성인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출처 : 성 이윤일 요한 묘지 안내판,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