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 우 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되었다.
서울 파자교(把字橋) 동북쪽(현 종로구 묘동 56번지) 즉 옛 단성사 자리에 있던 좌포도청에서는 서울의 동부 · 중부 · 남부 지역과 경기좌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우포도청은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 1가 89번지) 즉 광화문우체국과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 사이에 있었고, 서울의 서부 · 북부 지역과 경기우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경기좌도는 지금의 강화 · 인천 · 수원 · 양평 · 광주의 이남 지역을 말하며, 경기우도는 지금의 고양 · 파주 · 양주 · 가평 이북 지역을 말한다. 이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좌포도청의 관할 구역인 경기좌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우포도청보다는 좌포도청에서 훨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천주교 신자 색출에 앞장선 포도청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년)의 집에서 있은 첫 세례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내는 일은 좌 · 우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때로는 매질 아래 목숨을 던지고, 목에 오라를 걸고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일각을 지체하지 말고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하라!” 조정의 추상같은 명이 있을 때마다 좌 · 우 포도대장들은 포교와 포졸들을 닦달하였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포도청의 영역은 박해가 계속될수록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포졸들의 육모 방망이와 홍사(붉은 오랏줄)는 이리저리 쫓기는 신자들을 겨냥하여 춤을 추곤 하였다.
죽음의 곤장 아래서 십자가의 영광을 증언하다 1795년(을묘년) 5월, ‘북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 좌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1752-1801년) 신부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신자들의 기지로 실패한 사건이었다. 대신 포교들은 밀사 윤유일(바오로, 1760-1795년)과 지황(사바, 1767-1795년),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1765-1795년)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으로 압송하였고, 그들은 조정의 명에 따라 혹독한 매질 아래 목숨을 바쳐야만 하였다. ‘비밀리에 때려 죽여 입막음을 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니, 이를 을묘박해라고 부른다. 순교 직전에 우리의 용감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저 십자 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이 되어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천만 번 죽을지언정 그분을 모독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을 증거하려면 시뻘건 숯덩이를 삼켜라!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소년 유대철(베드로, 1826-1839년) 성인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1791-1839년) 성인의 맏아들로 집안의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순교자와 증거자들의 꿋꿋한 용기를 보면서 순교의 원의가 불타오른 소년 유대철은 스스로 포도청을 찾았다.
이어지는 혹독한 형벌로 너덜거리는 살점과 사방으로 튀는 핏방울 속에서도 박해자들은 결코 은총의 힘을 얻은 어린 소년을 다스릴 수 없었다. 포졸이 구리 대통으로 허벅지 살점을 떼어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단호하였다. “어떠한 형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그러자 소년 유대철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 아세요.”라고 답하였다.
작은 천사의 용기는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하고 말았으니, 때는 1839년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이때 유대철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춤추는 곤장, 난무하는 남형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주리질(주뢰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년)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년)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태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석이다.” 그렇게 성인은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포도청의 옥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순례지 성당 지정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 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고, 본당의 수호성인 또한 ‘포도청 순교 성인들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100년에 가까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던 서울 좌 · 우 포도청 순교지가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좌포도청 표석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묘동 56번지(옛 단성사 자리) 종로 3가역 9번 출구 앞에, 우포도청 기념 표석은 종로구 종로 1가 89 일민미술관 앞 화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 마련 한편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된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여 2013년 9월 2일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으며, 성당 외벽에 포도청 순교성인들을 기념하여 설치한 청동부조 ‘수난과 영광’(김일영 교수 작) 제막식도 가졌다. 아울러 종로 성당에서 시작하여 좌우 포도청 터 등을 거쳐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에 이르는 2개의 도보순례길 코스를 제시하였다. [출처 : 종로 성당 포도청 순례 리플렛,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 ‘천주교 서울 순례길’ 바로가기
포도청(捕盜廳)
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서. 좌포청(左捕廳) · 우포청(右捕廳) 양청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이후에 창설되었다. 좌포청은 당시 중부(中部)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단성사 일대)에, 우포청은 서부(西部)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구 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포도청은 1894년 갑오 개혁 때 폐지되었고, 대신 내무아문(內務衙門) 소속의 경무청(警務廳)이 설치되었다.
설립과 임무 포도청은 1471년(성종 2년) 도적의 횡포를 근절하기 위해 홍이로(洪利老)를 경기도 포도장(捕盜將)에, 조한신(曺漢臣)을 황해도 포도장에 임명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리고 1481년(성종 12년)에는 ‘포도사목’(捕盜事目)을 제정하여, 좌 · 우 포도장을 두고 한성부와 경기도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포도장 제도는 전국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 치폐를 거듭하다가 1541년(중종 36년)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설치하면서 비로소 포도청이 상설 기구화되었다.
포도청의 직제는 16세기 중반에 가서야 제자리를 잡게 되며, 영조 때 만들어진 “속대전”(續大典) ‘병전’(兵典)에 의해서 법제화되었다. 이때 정해진 포도청의 직제로는, 좌 · 우 포도장 각 1명(좌 · 우윤을 역임한 사람으로 차임, 종2품), 좌 · 우 포도군관 10명, 좌 · 우 포도부장 3명, 포도군사 각 50명이었다. 그러나 도성 안팎에서 성행하는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였고, 이에 종사관(從事官) · 무료부장(無料部長) · 가설부장(加設部將) · 겸록부장(兼祿部將) · 서원(書員) · 사령(使令) 등이 증설되는 가운데, 19세기에 이르면 290여 명의 관헌이 한성부의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 포도청은 서울과 경기 일원을 관할 범위로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서울이 도성 밖 성저(城底) 십리(十里)까지 확대되면서 경기 지역은 포도청의 업무 지역에서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좌 · 우 포도청은 서울을 각기 8패(牌), 곧 8개 지역으로 나누어 순찰하면서 치안을 유지하였다.
포도청의 임무에 대해 “속대전”에는 “도적과 간악한 불량배를 체포하고 야경을 도는 것을 관장한다”(掌輯捕盜賊奸細分更夜巡)라고 규정하고 있다. 도적은 강도와 더불어 물건을 훔친 절도 죄인의 경우가 일차적으로 해당되는데, 여기에는 궁궐이나 관청의 물건을 훔친 경우도 포함된다. 그리고 일반 단순 절도범은 물론이고 부녀자를 납치하는 경우도 절도죄에 해당되었다.
도적의 범주에는 화적(火賊)들도 포함되었다. 즉 조선 중기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화적을 체포하고 조사하여 상급 기관에 넘기는 일은 포도청의 기본 업무였다. 그리고 모반 · 역모 사건, 괘서(掛書), 부방(付榜) 사건도 역시 국가 안전과 관련된 문제로 포도청에서 일차적으로 조사를 담당하였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사학(邪學) 관련 죄인들에 대해 기찰과 단속이 엄격해지는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던 이 시기에는 천주교도들을 수색하고 체포 · 조사 · 처형하는 것이 포도청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게다가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면서 서양 선박과 접촉하거나 장사를 한 사람들에 대한 단속도 포도청 업무에 추가되었다.
이외 금제(禁制), 금화(禁火), 수직(守直), 풍속 사범 단속 등도 역시 포도청의 중요한 임무였다. 즉 우금(牛禁, 소 도살 금지), 주금(酒禁), 송금(松禁, 소나무 벌채 금지) 및 교자(轎子)를 타는 것, 무인(武人)들의 도박 활쏘기, 도고(都庫), 잠상(潛商) 등에 대한 단속도 포도청의 업무였으며, 화재에 대한 사후 처리와 사전 감시 등도 포도청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도박 등 풍속을 단속하거나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 행위를 적발하고 조사하는 것도 포도청의 소관이었으며, 임금이 능행(陵幸)할 때 현직 양 포도대장이 가마를 수행하는 업무도 추가되었다.
포도청은 상급 기관인 형조, 의금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해 일차적으로 조사하고 죄인을 체포하였으며, 이후 사안에 따라 단순한 중죄인은 형조로 이관하고, 역모 · 사학 죄인 등과 강상(綱常) 죄인은 의금부로 이관하였다. 아울러 한성부나 지방 관아에서 죄인을 다루다 포도청으로 이송하는 경우도 있었다.
천주교와 포도청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임무는 서울을 포도청을 비롯하여 지방의 진영(鎭營)이나 수영(水營) · 병영(兵營) 등에서 담당하였다. 이 중 포도청은 관할 구역인 서울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신자들을 체포하여 압송하였다. 포도청 소속의 포졸들이 다른 지역에서 신자들을 체포해 올 때는 우선 해당 지역 수령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뒤, 그 고을을 포졸들과 함께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또한 지방의 진영이나 수영 및 병영에서 신문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 상급 기관의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들도 서울의 좌 · 우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같이 포도청에서 직접 체포한 신자들과 지방에서 이송된 신자들은 좌 · 우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상급 기관인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신문을 받고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신자들의 처형은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白紙死刑)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 · 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좌 · 우 포도청 자리는 박해 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조윤선, 한국가톨릭대사전 11권]
의금부(義禁府)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종로 1가 44번지(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조선의 군사체제가 정비되면서 의금부 기능은 축소되어 정치범이나 중죄인 등을 다스리는 사법 전담 기관이 되었다. 의금부는 한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는데, 현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인근의 SC제일은행 화단에 표지석이 서 있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다. [자료제공 : 한국교회사연구소]
의금부에서 국문(鞫問)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 천주교 신자 가운데 성인과 복자
박해(연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지 |
비고 |
신유박해(1801년) |
주문모 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최창현 |
요한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정약종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홍교만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최필공 |
토마스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홍낙민 |
루카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강경복 |
수산나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유항검 |
아우구스티노 |
전주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윤지헌 |
프란치스코 |
전주 |
복자 |
기해박해(1839년) |
앵베르 주교 |
라우렌시오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모방 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샤스탕 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유진길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정하상 |
바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조신철 |
가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남이관 |
세바스티아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김제준 |
이냐시오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베르뇌 주교 |
시메온 |
새남터 |
성인, 제4대 조선교구장 |
병인박해(1866년) |
브르트니에르 신부 |
유스토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볼리외 신부 |
베르나르도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도리 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남종삼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최형 |
베드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정의배 |
마르코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전장운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경기감영(京畿監營)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평동 164번지(서울적십자병원)
감영(監營)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말한다. 관찰사(감사)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관할 지역 내에서 군사 · 행정 · 감찰 · 사법권을 행사했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도로변에 표지석이 서 있다.
1784년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경기 지역에는 신자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체포된 신자들이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용삼(베드로, ?-1801년)이 순교했다.
조용삼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의 문하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몸이 쇠약했음에도 혹독한 형벌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박해자들에게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용삼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자료제공 :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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