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 살던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 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가 이 교우촌에서 살았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삽티에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병인박해로 인해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1866년 말 황천일과 황기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홍산현에 체포되고 서울에 이수되어 무참히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이 안장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1922년 시복조사 재판에서 72세의 나이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는 “병인년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증언하였다. 황 마르타의 증언 이후 이곳 삽티의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묘를 찾아 돌보거나 옮긴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1962년 삽티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스러진 묘터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 등 성물을 발굴했다.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 신빙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장 신빙 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묘역으로 바뀌었다. 당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2년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2018년 부여군은 성물 발굴지점으로부터 100미터 거리의 봉우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황석두 성인의 안장기념 자리로 표시했다. 십자가를 향하여 순례자들이 기도하는 이 자리를 ‘황석원(黃錫園)’이라 칭하고 황석두 성인 안장 묘원을 꾸몄다. 또한 묘원 안에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제대를 안치하여 ‘황석정(黃錫亭)’을 건립했고, 제대 뒤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인 “나는 천당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를 새겨 놓았다. 현재 삽티 성지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성지’를 잇는 도보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어, 숨죽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출처 :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대전주보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