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르모가스테스는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반달족의 왕국을 세운 아리우스파(Arianism) 왕인 가이세리크(Gaiseric, 428~477년 재위)의 아들 테오데리크(Theoderik) 왕자의 궁정에서 고위 관리로 일하던 로마 귀족이었다. 로마(Roma)를 약탈하고 457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가이세리크는 가톨릭 신자에 대한 엄격한 형법을 도입하고 잔인한 박해를 시작했다. 성 아르모가스테스도 모든 직책과 특권을 박탈당한 후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테오데리크 왕자에 의해 참수형이 결정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사제로부터 그를 순교자로 만들지 말라는 말을 듣고 채석장으로 보내 노예로 일하게 한 후 카르타고(Carthago, 오늘날 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인 튀니스[Tunis] 일대에 있었던 고대 도시) 외곽으로 추방해 소 치는 일을 하도록 했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탁을 받은 다른 그리스도인에 의해 미리 알려준 나무 아래 안장되었다. 성 아르키니모(Archinimus)는 로마제국의 속주인 누미디아(Numidia, 오늘날 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의 도시인 마스쿨라(Mascula, 오늘날 알제리 북동부의 켄첼라[Kenchela]) 출신의 가톨릭 신자로 아리우스파에 의해 혹독한 고문과 고통을 당했다. 가이세리크 왕의 아들로 나중에 왕위를 계승할 후네릭(Huneric, 477~484년 재위) 왕자의 집사였던 성 사투로(Saturus) 역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아리우스파로 개종하라고 간청했으나 신앙을 포기하느니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가난하게 사는 편이 낫다며 구약성경 욥(Job)의 말(“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2장 10절)을 인용해 아내를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지처럼 쫓겨나 목동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9일 목록에서 반달족 아리우스파 왕인 가이세리크의 박해 때 거룩한 ‘증거자’ 성 아르모가스테스 백작, 성 마스쿨라, 성 아르키니모, 성 사투로가 참된 신앙을 고백한 대가로 혹독한 고문과 비난을 견딘 후 영광스러운 전투의 끝에 도달했다고 전해주었다. 서로 다른 시간과 환경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백한 이들을 같은 날 함께 기념하는 것은 북아프리카의 주교이자 역사가인 비타의 빅토르(Victor Vitensis)가 반달족의 왕인 가이세리크와 후네릭의 통치하에 자행된 박해의 역사를 기록한 저서에서 그들의 이름을 차례로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르키니모의 출신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마스쿨라’라는 지명을 옛 “로마 순교록”은 별도의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29일 목록에서 아프리카 반달족의 박해 당시 아리우스 왕 가이세리크 치하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잔혹한 고문과 불명예를 겪은 순교자 성 아르모가스테스와 성 아르키니모와 성 사투로를 기념한다고 세 명의 이름만을 전하며, “성인전”(Acta Sanctorum)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들을 순교자로 기록하였다. 성 사투로는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또는 사투르니노)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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