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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10.24)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10.24)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Anthony Mary Claret)
축일 10월 2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설립자
활동지역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
활동연도 1807-1870년
같은이름 글라렛, 메리,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앙투안,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클라레
성인 기본정보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클라렛(Antonius Maria Claret, 또는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1807년 12월 23일 에스파냐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비크(Vic) 교구 관할인 살렌트(Sallent)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살 때부터 아버지의 직조 작업을 도우며 인쇄술을 배웠고, 17살 때는 직조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갔다. 그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며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지만, 어려서부터 소망했던 사제직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라토리오 신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권고대로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다. 21살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사제직에 대한 소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카르투지오회에 입회하기로 했다. 그러나 1829년에 비크 교구의 주교를 알게 되고 또 아버지의 뜻을 따라 비크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성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Francis Coll Guitart, 4월 2일) 신부와 우정을 맺었다. 그리고 1835년 6월 13일 파도바(Padova)의 성 안토니오의 축일에 28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고 비크 교구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고향인 살렌트에서 처음으로 사목활동을 하며 신학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카르투지오회의 엄격한 규칙을 감당할만한 건강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수도회 입회에 여전히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해외 선교 활동에 나서려는 뜻을 품고 1839년에 로마(Roma)의 포교성성(Congregation of Propaganda)으로 갔다. 그곳에서 해외 선교를 위해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시작했지만 역시나 건강 문제로 수련을 중단하고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장상들은 그에게 에스파냐로 돌아가서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는 ‘사도적 선교사’가 되라고 권고했다. 1840년 고국으로 돌아와 본당신부로 임명되었고, 1843년부터는 선교사로 카탈루냐 전역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피정을 지도하면서 유능한 설교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왕위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카를로스파 전쟁’(Carlist Wars)이란 내전 중이었는데,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치지 않고 설교하며 몇 시간씩 앉아서 고해성사를 들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선교 사도직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회심을 이끌었고, 그러면서 많은 성직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만 번이 넘게 설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언제나 성체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였다.

   1835년 이후 에스파냐에서는 반성직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도미니코 수도회와 작은 형제회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일부 교구 사제들만이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처럼 교리와 대중 설교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여성들을 위한 여러 모임을 설립하고, 1847년에는 종교 서적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배운 인쇄술과 제본에 관한 기술을 조언하며 복음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활용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를 위한 선교 사업을 꾸준히 지원할 공동체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849년 7월 16일, 뜻을 같이하는 다섯 명의 사제들과 함께 설교 활동을 하는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의 아들들의 선교 수도회’(Congregatio Missionariorum Filiorum Immaculati Cordis Beatae Mariae Virginis, CMF)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는 오늘날 보통 ‘글라렛 선교 수도회’(Claretian Missionaries)로 부르고 있다.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다. 1850년에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라 2세(Isabella II)의 요청으로 쿠바(Cuba) 남동부 산티아고데쿠바의 대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그는 비크 교구에서 주교품을 받고 바르셀로나를 떠나서 쿠바로 향했다. 당시 쿠바 교회는 오랫동안 주교좌가 공석인 상태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는 7년 동안 세 번이나 방대한 관할 구역을 순회하고 50여 개의 새로운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신학교를 다시 열고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를 마련하고 성직자들의 쇄신을 추진하였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회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진과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병원을 방문해 병자와 임종자를 돌보는데 헌신하고, 흑인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그리스도교 가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협동조합을 결성하도록 이끌어주었다. 또한 결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농사법도 권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을 펼치는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반대자의 표적이 되었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1857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에스파냐로 돌아온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이사벨라 2세 여왕의 고해신부 겸 왕실의 영성 지도자가 되었다. 명예롭지만 매우 어려운 직책을 맡은 그는 많은 시간을 궁정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왕실 가족과 함께 에스파냐를 여행할 때마다 설교와 글을 통해 선교 활동을 계속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궁정에서 지내는 시간이 자신에게는 끊임없는 순교와 같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에스파냐 전역의 가난한 사람과 죄수들, 병원을 대상으로 피정 지도를 하는 등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인쇄 매체를 통한 대중적인 서적이 말로써 하는 설교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카탈루냐와 마드리드(Madnd)에 출판사를 설립하여 200여 권의 가톨릭 소책자를 인쇄하여 보급하였다. 그 책자 중 대부분은 그가 직접 집필한 것이었다. 문화 방면에도 관심이 컸던 그는 1859년부터 에스코리알(Escorial) 수도원 학교의 학장을 역임하면서 과학 연구소 · 자연사 박물관 · 음악 학교 · 언어 학교를 세우는 등 그리스도교 문화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궁정에서 활동하던 그는 자연히 성직과 교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868년 자유주의자 장군들의 혁명으로 여왕이 폐위되고 추방될 때 그 또한 함께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로마로 가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1969~1870년) 준비에 참여하여 1870년 5월 31일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옹호하는 설교를 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뇌졸중을 앓기도 했던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에스파냐 송환 시도를 피해 프랑스 남부 나르본(Narbonne) 근처 퐁프루아드(Fontfroide)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1870년 10월 24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원했던 대로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새겨졌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였기에 유배지에서 죽는다.” 그에 대한 시복 절차는 1887년에 시작되었고, 그의 유해는 1897년 에스파냐의 비크로 이장되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34년 2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고, 1950년 5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1960년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면서 1969년 전례력 개정 전까지 10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했었다. 개정 이후로는 선종한 날인 10월 24일로 옮겨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는데, 전례력 개정 전까지 10월 24일은 이미 성 라파엘 대천사의 축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4일 목록에서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가 사제품을 받은 후 에스파냐 카탈루냐 지역을 여러 해 동안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의 아들들의 선교 수도회를 설립했으며, 쿠바 산티아고데쿠바의 주교가 된 후에는 영혼 구원을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에스파냐로 돌아온 후에도 교회를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프랑스 남부 나르본 근처 퐁프루아드의 시토회 수도승들 사이에서 유배 생활 중에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직조공의 수호성인이자 현대 에스파냐의 가장 위대한 성인 중 한 명으로 공경받고 있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23-125쪽.
  • 남기은 편, 영성의 향기 - 수도회 창립자들의 영성, 서울(성바오로), 1998년, 122-125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834-5835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서울(성바오로), 2002년, 275-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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