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알폰수스 로드리게스(Alphonsus/Alfonso Rodriguez, 또는 알폰소 로드리게스)는 1533년 7월 25일 에스파냐 중부 세고비아(Segovia)에서 성공한 양모업자의 11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를 설립한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의 초기 동료 중 하나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Pierre Favre, 8월 1일)와 다른 예수회 신부가 세고비아에 선교하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들을 환대하며 숙식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열 살 무렵이었던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는 자연스럽게 예수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동안에 그는 성 베드로 파브르 신부의 도움을 받아 첫영성체를 했다. 그리고 12살이 되었을 때 형과 함께 알칼라데에나레스(Alcala de Henares)에 있는 예수회 대학으로 보내져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가업을 이어받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세고비아로 돌아왔다. 그가 23살 때 어머니는 사업에 관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은퇴하였다. 그리고 3년 후에 그는 마리아 수아레스(Maria Suarez)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 그의 결혼 생활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린 첫째 아들에 이어서 딸 그리고 막내아들과 부인마저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섬유산업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세금 정책으로 양모와 옷감을 취급하는 그의 가업도 점점 기울어 문을 닫아야 할 지경까지 갔다. 자녀와 아내를 잃고 사업도 망하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연달아 겪으면서 분노와 좌절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예수회원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회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고자 했지만, 이미 나이도 35살 정도 되었고 어려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사제가 되기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회의 오랜 친구 신부를 찾아 발렌시아(Valencia)로 갔다. 그리고 2년 동안 어릴 때 마치지 못한 기본 교육을 이수하고 다시 예수회 입회를 지원하였다. 그는 사제 지망이 안 된다면 평수사로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지원했고,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으나 다행히 입회 허가를 받았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는 1571년 1월 31일 38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발렌시아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6개월 후 그는 마요르카섬(Mallorca Is.)의 수도인 팔마(Palma)에 새로 설립된 몬테시온(Montesion) 대학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수련기를 마치고 1573년 4월 5일 첫서원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40년 이상 여생을 문지기 수사로서 헌신하며 살았다. 그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단순한 일을 하면서 늘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그와 만나면서 점차 그의 성덕을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조언과 충고를 받기 위해 찾는 이들도 많아졌다. 특히 학생 중에서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이로는 성 베드로 클라베르(Petrus Claver, 9월 9일)가 있었다.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그와 함께 기도와 성덕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고, 그의 조언대로 신대륙 선교사를 지망해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Cartagena)로 가서 아프리카에서 팔려 온 흑인 노예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런데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의 생애와 성덕에 대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보여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친절, 순명과 성덕, 기도 생활의 깊이와 영적인 은총의 체험은 장상의 요청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회고록”(Memorias)과 영적 노트를 통해 사후에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아들이 어머니와 대화하듯 성모님과 대화를 나누는 등 신비로운 체험도 회고록을 통해 남겼다. 말년에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1615년부터 더는 문지기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대부분 시간을 침상에 누워지내야 했다. 그리고 1617년 10월 31일 형제들의 기도 속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몬테시온 예수회 대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1825년 5월 20일 교황 레오 12세(Leo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888년 1월 15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성 베드로 클라베르를 비롯한 여러 복자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의 축일은 처음에 10월 30일에 기념했으나 오늘날 예수회에서는 선종한 날인 10월 31일에 그를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30일 목록에서 마요르카섬의 팔마에 예수회의 평수사인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가 있었는데, 그는 놀라운 겸손과 끊임없는 고행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교황 레오 13세가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31일로 축일을 옮겨 마요르카섬의 팔마에서 기념하는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모든 소유물을 잃은 후 예수회의 수도자로 받아들여졌으며, 오랫동안 대학의 문지기 직무를 수행하면서 겸손과 순종 그리고 희생의 모범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팔마시(市)와 마요르카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는 에스파냐에서는 성 알론소 로드리게스(Alonso Rodriguez)로 불린다.♣
|
|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
| 1 | [알폰소 로드리게 ...] | 성 알폰소 로드리게즈: 학생들 신앙 문지기로 | 주호식 | 2009/11/01 | 560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