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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야코부스(Jacobus, 또는 야고보)는 1394년경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지역의 아스콜리피체노(Ascoli Piceno) 근처 몬테프란도네(Monteprandone)에서 가난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도메니코(Domenico)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그 후 사제인 친척의 도움으로 오피다(Offida)와 아스콜리피체노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서 뛰어난 지능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페루자(Perugia) 대학교로 가서 법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민법 학위를 받은 후 그는 피렌체(Firenze)에서 공증인으로 일하다가 1416년에 22살의 나이로 아시시(Assisi)에서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OFM)에 입회하였다. 그는 수도복을 입으면서 야고보라는 수도명을 받았는데, 작은 형제회의 관습에 따라 지역 이름을 붙여서 ‘마르케의 야고보’(Jacobus de Marchia/Giacomo della Marca/James of the Marches)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수련기를 마친 후 피렌체 외곽의 피에솔레(Fiesole)에서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5월 20일)의 제자가 되어 수학한 후 1423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29살의 나이로 사제가 된 그는 즉시 피렌체로 파견되어 이단자를 상대로 설교를 시작했고, 이어서 토스카나(Toscana), 움브리아(Umbria), 마르케 지방을 돌며 설교하였다. 그리고 1432년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로부터 헝가리로 가서 설교하라는 전갈을 받고 즉시 당시 헝가리의 일부였던 나기바라드(Nagyvarad, 오늘날 루마니아의 오라데아[Oradea])로 가서 이교도를 상대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카페스트라노(Capestrano)의 성 요한(Joannes, 10월 23일)을 도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개혁과 화합을 위한 활동도 했다. 1337년에 그는 보헤미아의 종교재판관으로 임명되어 후스파(Hussites)와 보고밀파(Bogomilism) 이단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투르크군과 싸우는 십자군을 지지하는 설교에도 나섰다. 이탈리아,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보스니아 등에서 설교가로 헌신한 성 야고보는 밀라노(Milano)의 대주교로 추천되기도 했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더욱 금욕적인 삶을 살며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고, 매일 단식과 얇고 낡은 옷만 입고 지내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의 활동 중 하나는 고향인 몬테프란도네에 작은 형제회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 훌륭한 시설을 갖춘 도서관을 만든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약 200여 권의 사본을 수집하고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61권의 사본이 오늘날에도 시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473년에 그는 나폴리(Napoli)의 수도원으로 가서 지내다가 1476년 11월 28일 선종하여 나폴리에서 가장 오래된 작은 형제회 성당인 산타 마리아 라 노바(Santa Maria la Nova)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보통 뱀이 빠져나오는 성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이단자들이 그를 독살하려 했던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르케의 성 야고보는 1624년 8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28일 목록에서 작은 형제회 소속 사제인 마르케의 성 야고보가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엄격한 삶과 사도적 설교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리스도교 사업을 수행해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성인 목록에 등재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작은 형제회의 사제이며 설교와 엄격한 생활로 유명한 마르케의 성 야고보가 나폴리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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