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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드문두스(Edmundus, 또는 에드문도)는 1175년경 영국 잉글랜드(England)의 옥스퍼드(Oxford) 근처 애빙던(Abingdon)에서 부유한 상인인 레이놀드(Reynold)와 메이블(Mabel)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자’라는 뜻의 ‘리치(Rich)’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성 에드문도의 아버지에게 붙은 별명이었는데, 성 에드문도와 그의 형제들은 생전이 이 별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성 에드문도와 그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금욕적인 삶을 실천했다. 성 에드문도는 애빙던의 수도원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 12살에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했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그는 들판을 혼자 걷다가 아기 예수님의 발현을 보았다. 그는 그 체험을 기억하기 위해 스스로 순결 서약을 하고, 그 표시로 두 개의 반지를 준비해 하나는 옥스퍼드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있는 성모상 손가락에 끼우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끼웠다. 성 에드문도는 옥스퍼드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프랑스 파리(Paris)로 가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성 에드문도는 사제품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222년경 당시 건축 중이던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의 참사 위원이자 재정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성당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성당 건축을 위해 수입의 상당 부분을 건축 기금으로 기부하였다. 그는 뛰어난 화술을 지닌 대중적인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1227년부터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의 요청에 따라 사라센에 대항하는 영국의 십자군을 상대로 설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1233년에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캔터베리 대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평소 은둔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선거 결과를 사양하고자 했으나 솔즈베리 주교의 뜻에 순명해 받아들였다. 1234년 4월 2일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주교품을 받고 주교 직무를 시작한 그는 엄격한 참회의 삶과 자선 활동으로 유명했다. 신임 주교로서 그는 중요한 개혁 규정들을 발표하며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을 쏟았다. 성 에드문도는 국왕 헨리 3세의 자문관으로도 활약했는데, 주교직에 오르자마자 헨리 3세와 그의 통치 방식에 저항하는 귀족들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한 중재자로 나서 내전을 막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237년에 대헌장을 비준할 때 헨리 3세를 보좌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에드문도는 교회의 규율을 강화하고 국왕에 대한 교회의 권리를 확고히 옹호했는데, 그 과정에서 교회법과 영국 민법의 불일치로 인해 헨리 3세와 갈등이 빚게 되었다. 특히 1237년에 헨리 3세는 교황을 설득해 오토 추기경을 영국의 특사로 파견하도록 했는데, 이는 엄연히 성 에드문도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또한 성 에드문도의 개혁으로 자신들의 특권이 제한된다고 생각한 대성당의 수도승들도 헨리 3세를 지지하며 그를 압박하였다. 결국 성 에드문도는 그해 12월에 로마(Roma)로 가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수도원과의 분쟁에 대해 논의하며 개혁에 대한 교황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헨리 3세와 격렬한 논쟁에 빠져들었고, 결국은 1240년에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 북쪽에 있는 퐁티니(Pontigny)의 시토회 대수도원으로 갔다. 퐁티니 수도원에서 두 달을 보낸 그는 다시 로마로 가려 했으나 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중 얼마 가지 못하고 그해 11월 16일에 프로뱅(Provins) 인근 수아지부이(Soisy-Bouy)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퐁티니의 수도원을 옮겨져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의 성 에드문도 순교자 축일인 11월 20일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시신은 캔터베리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곳의 베네딕토회 수도승들이 성 에드문도에 의해 자신들의 고유한 권한이 침해되었다고 생각해 반대했기 때문이다. 성 에드문도는 박학하고 뛰어난 성덕과 정의감을 지녔으나 주교로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임종하는 자리에서 그는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저서 가운데 현존하는 “교회의 거울”(Speculum Ecclesiae)은 중세 영국의 신비주의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성 에드문도는 1246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IV)에 의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캔터베리의 성 에드문도는 애빙던의 성 에드문도로도 불린다. 그리고 종종 그의 아버지에게 붙었던 ‘리치’라는 별명과 함께 성 에드문도 리치(Edmund Rich)로도 불리는데, 성 에드문도는 생전에 그런 별명을 받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6일 목록에서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이자 증거자인 성 에드문도는 교회의 권리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프랑스의 프로뱅 근처에서 선종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프랑스의 프로뱅 마을 근처에서 캔터베리의 주교였던 성 에드문도 리치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교회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퐁티니의 시토회 수도승들 사이에서 성인다운 삶을 살다가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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