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283년경 이탈리아의 사르데냐섬(Sardegna Is.)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박해 때 체포되어 재판을 위해 로마로 호송되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그 후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어린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로마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교황인 성 에우세비오(8월 17일)에게 세례성사를 받으며 어머니의 뜻대로 교황과 같은 세례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교육받으면서 그리스도교가 박해의 시대에서 자유로운 신앙으로 나아가는 급변하는 세상을 경험했고, 훗날 교황이 된 리베리오(Liberius, 352~366년 재위)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인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알게 되었다. 로마에서 독서직을 받은 그는 340년 또는 345년 12월 15일에 교황 성 율리오 1세(Julius I, 4월 12일)에게 주교품을 받고 이탈리아 북부 베르첼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사도로서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하며, 교구 내 성직자 개혁 운동을 전개하여 모든 성직자가 기도 · 노동 · 연구 · 고행 등의 공동 규칙을 지키며 성직 생활과 수도 생활의 일치를 시도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 역시 일단의 성직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밀라노(Milano)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는 성 에우세비오가 주교 직분을 수행하면서 수도 생활을 실천한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한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리를 철저히 지켜온 주교였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Arianism)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로서 많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353년 아를(Arles) 교회 회의에서 정통 교리를 옹호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결의를 하자, 그는 리베리오 교황의 명으로 아를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337~361년 재위)를 방문해 아리우스 이단과 가톨릭 정통 신앙 사이의 논쟁을 해결할 새로운 교회 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였던 황제는 그 기회에 서방에 아리우스주의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355년 봄에 밀라노(Milano)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참석한 주교들에게 성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결의안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였다. 성 에우세비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고, 그로 인해 황제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갈릴래아에 있었던 데카폴리스[Decapolis]의 하나로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의 베트셰안[Beit She’an])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너무도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한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나흘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360년에 그는 스키토폴리스에서 다시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그다음에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Luxor])로 유배지를 옮겨야 했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 재위)가 등극하면서 유배된 주교들 모두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자유를 찾은 그는 362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성 아타나시오와 함께 새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니케아 신경을 복원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육화의 신비를 부정하는 이단에 맞서며,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안티오키아(Antiochia) 교회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안티오키아 교회로 파견될 사절로 뽑힌 그는 361년에 일단의 아리우스파와 가톨릭교회에서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서로 추천했다가 나중에 아리우스파의 개입을 이유로 가톨릭교회에서 반대한 성 멜레시오(Meletius, 2월 12일)의 주교 선출과 그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고자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했다. 그 후 그는 안티오키아를 떠나 자신의 교구로 돌아오는 길에 일리리쿰(Illiricum, 오늘날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에 있었던 로마 제국의 속주) 지역의 여러 교회를 방문해 정통 신앙을 옹호하고 아리우스 이단을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도록 독려했다. 363년 봄에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 에우세비오는 리베리오 교황에게 자신의 선교 활동을 보고하고, 8년간 자리를 비웠던 베르첼리의 주교좌로 돌아왔다. 사목 활동을 재개한 그는 푸아티에(Poitiers)의 성 힐라리오(Hilarius, 1월 13일) 주교와 함께 아리우스 이단에 물든 밀라노의 주교들에 반대해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데 헌신하다가 371년 8월 1일 베르첼리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베르첼리의 순교자인 성 테오네스토(Theonestus, 11월 20일)의 무덤 위에 그가 건축한 성당 위에 세워진 오늘날의 베르첼리 대성당(Duomo di Vercelli)에 묻혔다. 현재 성 에우세비오가 쓴 세 통의 편지가 전해지고 있고, 베르첼리 주교좌성당 도서관에 있는 고대 라틴어 복음서 사본은 보물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Vulgata)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으리라 추정하고 있고, 그래서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이라고 부른다. 그는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일 목록에서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에우세비오가 베르첼리에 있었다며, 그가 가톨릭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스키토폴리스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카파도키아로 유배 갔고, 나중에 자신의 주교좌로 돌아온 후 아리우스파의 박해 때 순교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축일은 12월 16일이라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의 축일은 원래 사망한 날인 8월 1일에 기념하다가 나중에 주교 수품일인 12월 15일로 옮겨 기념했었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5일 목록에서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의 축일을 거행하는데, 그의 천상 탄일은 8월 1일이며,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12월 16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고 했다. 교황 베네딕토 13세(1724~1730년 재위)는 12월 15일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8일 축제와 겹치는 관계로 12월 16일로 옮긴 듯하다. 그 뒤로는 1969년 전례력 개정 이전까지 그의 축일을 12월 16일에 기념했었다. 그리고 그가 주교이자 순교자로 기억되었던 것은 아리우스파의 돌에 맞아 순교했다는 전설과 비록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가톨릭의 정통 신앙을 지키다가 많은 고통을 겪었기에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8월 2일에 기념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이를 반영해 8월 1일 목록에서 베르첼리에서 성 에우세비오 주교의 기일을 기념하고, 다음날 추모식을 거행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8월 2일 목록에서는 베르첼리의 초대 주교였던 성 에우세비오가 피에몬테 지역의 교회를 통합하고, 니케아 신앙을 고백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스키토폴리스로, 다시 카파도키아와 테베로 추방되었다가 8년 만에 주교좌로 돌아와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신앙을 재건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고 기록하였다. 순교자라는 칭호는 삭제하였다. 성 에우세비오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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