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간난 아가타는 서울의 어느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 시집을 갔으나 3년 후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혼자 생활하였다. 1834년에야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들은 후 그녀는 재가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신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간청하였다. 다행히 친척 중에 신자 한 명이 있어 쉽게 원을 풀 수 있었다. 이 친척이 아가타와 그 어머니와 오라비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여 믿게 하였고,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는 천주교를 매우 싫어했는데, 집안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알자 크게 노하여 아내와 아들은 경상도로 쫓아버리고, 아가타는 남편이 죽고 없는 시집으로 돌려보냈다. 아가타는 아버지의 뜻대로 남편도 없는 시집으로 되돌아가서 온순하고 친절하게 시집 식구들을 대한 결과 시집 식구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시누이 한 사람까지 입교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시집에서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아가타는 약간의 돈을 모아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가까운 여교우들과 함께 이사하였다. 이사한 집에서 아가타는 열렬한 신앙으로 여러 가지 고신극기를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주 단식하여 신자들로부터 “거울과 같이 맑고 눈과 같이 희다”는 평판을 들었다. 1846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얼마동안 자신의 집에 숨어 지냈으나, 7월 15일에 현석문 카롤루스(Carolus)의 집에 있다가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테레사(Teresia), 정철염 카타리나(Catharina)와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아가타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포졸들에게 “우선 내 집에 가서 옷가지를 가지고 떠납시다.”라고 말할 정도로 순교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당해야 했던 고문과 형별을 알려져 있지 않으나, 어느 증인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한 동안 배교의 유혹을 받아 약간의 내적 동요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인내하여 마지막으로 곤장 50대를 맞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33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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