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주(Emilia-Romagna州)의 볼로냐(Bologna)와 라벤나(Ravenna) 사이에 있는 이몰라에는 오래전부터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또는 카시아노)라는 순교자의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있고, 후대에 그의 무덤 위에 대성당(Cattedrale di San Cassiano)이 건립되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가 통치하던 300년경 이몰라(고대에는 코르넬리우스 포룸[Forum Cornelii]으로 불렸음.)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순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5세기 초에 에스파냐 출신의 라틴 그리스도교 시인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가 산문으로 쓴 시(詩)이다. 로마(Roma)로 가던 여행 중에 프루덴티우스는 이몰라에 들러 순교자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유해는 석관에 보존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순교 당시의 일화가 묘사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리인으로부터 그 석관의 주인공이 성 카시아노라는 설명을 듣고 그를 기리는 시를 썼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3일 목록에서 프루덴티우스가 보고 들었던 내용을 중심으로 성 카시아노에 대해 전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성 카시아노는 소년들에게 문법과 문학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교사였다. 그는 이교도의 자녀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도 포함했는데, 그로 인해 부모들의 반대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신상 앞에 희생제물 바치기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대리석 기둥에 묶여 그가 가르치던 소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독특한 형벌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어린 소년들의 깃펜 등에 찔려 순교했는데, 소년들의 나약한 힘으로 인해 그가 느끼는 고통은 더 오래 지속되고 극심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소년들을 격려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의 고통을 받아들였다. 이몰라 출신으로 라벤나의 주교가 된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Petrus Chrysologus, 7월 30일)는 성 카시아노에 대한 각별한 신심을 갖고 있어서 그의 유해 근처에 묻히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런데 11세기에 익명의 티롤(Tirol) 사람이 몇 명의 주교에 대한 전기(Vita et gesta Cassiani, Ingenuini et Albuini episcoporum)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성 카시아노를 사비오나(Sabiona, 이탈리아 북부 남티롤의 볼차노[Bolzano] 인근 도시로 현재 사비오나 수도원이 남아 있다)의 주교로 묘사하였다. 성 카시아노는 사비오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이몰라로 유배되었고, 그곳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도록 강요당했으며, 프루덴티우스가 묘사한 방식으로 순교했다고 했다. 성 카시아노의 순교에 대해서는 이렇게 두 가진 대표적인 전승이 전해지는데, “로마 순교록”은 프루덴티우스의 전승을 받아들여 전해주었다. 성 카시아노는 교육자, 교사, 학생, 속기사의 수호성인이자 이몰라와 볼차노-브레사노네(Bolzano-Bressanone) 교구 등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종종 주교로 묘사되거나 옷을 벗고 대리석 기둥에 묶여 소년들로부터 수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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