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자 콘라두스 콘팔로니에리(Conradus Confalonieri, 또는 콘라도)는 1290년경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 인근 칼렌다스코(Calendasco) 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아첸차에서 가장 명망 있는 귀족인 콘팔로니에리 가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젊고 경건한 귀족 여성인 에우프로시나(Eufrosina)와 결혼하였다. 그는 신심 깊은 신앙인이었지만 귀족 신분에 걸맞은 평범한 삶을 즐겼다. 평소 사냥을 즐기던 그는 어느 날 가족 소유의 영지로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감이 덤불 속에 숨자 하인들에게 덤불을 태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쳐서 옥수수밭을 비롯해 숲 전체를 태우고 인근 마을까지 불태우는 불상사로 번졌다. 거센 불길에 당황한 그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고,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한 가난한 농부가 방화범으로 오해받아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었다. 뒤늦게 한 소작농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장으로 끌려가게 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고심 끝에 재판관 앞으로 가서 자신이 실수로 불을 냈음을 고백했다. 그는 벌금과 피해 보상금으로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아내의 지참금까지 모두 몰수당했고, 귀족 신분 덕분에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복자 콘라도와 그의 아내는 재물의 부질없음을 깨달았고, 그 모든 경험이 향락에만 빠져 살던 귀족 생활을 버리라고 부르시는 하느님의 섭리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별거하여 속죄의 삶을 살기로 하고 수하 사람들을 모두 자유로운 신분으로 해방한 후 아내는 피아첸차에 있는 성 클라라 수도회(Ordo Sanctæ Claræ, OSC)에 입회하도록 주선한 후 자신은 작은 형제회 제3회(오늘날의 재속 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 Saecularis, OFS])에 들어가 외딴곳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금욕적 삶에 대한 명성을 듣고 많은 제자가 몰려오자 그는 더 고적한 삶을 위해 로마(Roma)와 예루살렘(Jerusalem) 성지를 순례한 후 몰타섬(Malta Is.)를 거쳐 1343년경에 최종 목적지인 시칠리아섬(Sicilia Is.)의 팔라촐로(Palazzolo) 항구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섬의 남쪽으로 내려가 시라쿠사주(Siracusa州)의 노토(Noto)로 갔다. 그는 노토 계곡의 어느 한적한 곳에 있는 동굴에 머물며 여생을 기도와 참회의 삶에 헌신하며 살았다. 만년에 그의 영성은 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했고 예언과 기적의 은사도 받았다. 복자 콘라도는 사람들로부터 숨은 은둔생활을 원했지만, 그의 뛰어난 성덕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그의 도움과 지도를 받고자 찾아왔다. 전설에 따르면 복자 콘라도는 전우였던 옛 친구가 탈장으로 고통받으며 찾아왔을 때 기도로써 그를 기적적으로 치유했다고 한다. 그의 기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빵의 기적’이었다. 그의 생애 말년인 1348년에 흑사병에 이은 기근이 닥쳤을 때 시라쿠사의 주교도 그에게 기도를 부탁하러 은둔소에 찾아왔었다. 그런데 이 기근 중에 그를 찾아온 모든 이들은 천사로부터 따끈따끈한 빵 한 덩이씩을 받았다고 한다. 주교 또한 그 빵을 받고 돌아갔다. 그리고 임종하기 얼마 전에 그는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자신을 방문했던 시라쿠사의 주교를 찾았다. 그가 도착했을 때 주변에는 펄럭이는 새들이 있었고, 그 새들은 고해성사가 끝난 후에 그를 노토 계곡으로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노토로 돌아온 그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처럼 새들과 야생동물들을 벗 삼아 살다가 1351년 2월 19일, 자신이 예언한 날에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장례식은 그가 유언한 대로 노토 중앙 광장에 있는 성 니콜라오(San Nicolo)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는 그곳에 묻혔다. 그 후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나면서 순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머물던 은수처 동굴은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산 코라도 푸오리 데 무라(San Corrado Fuori le Mura, 성벽 밖의 산 코라도)로 불리며, 많은 이들이 고요함 가운데 기도하러 찾는 성지가 되었다. 복자 콘라도에 대한 시복 절차는 1485년 시작되었고, 1515년 교황 레오 10세(Leo X)가 그를 복자품에 올리며 노토 지역에서 그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허락하였다. 1625년에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전체에서 그를 기념하는 미사와 성무일도를 거행하도록 허가하였다. 한편 피아첸차의 추기경도 복자 콘라도가 피아첸차 인근 칼렌다스코에서 태어났음을 밝혀내고 그에 대한 공경을 허용하며 그의 출생지에 그를 기념하는 경당을 건립하였다. 복자 콘라도의 유해는 1693년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후 새 도시의 산타 키아라(Santa Chiara)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96년에 노토의 성 니콜라오 주교좌대성당(Basilica cattedrale di San Nicolo)으로 다시 옮겨져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고 작은 형제회에서도 매년 2월 1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해 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19일 목록에 그의 이름을 추가했는데, 피아첸차 출신의 복자 콘라도 콘팔로니에리가 작은 형제회 제3회의 은수자로서 세속적인 쾌락을 버리고 약 40년 동안 끊임없는 기도와 매우 엄격한 참회의 생활을 실천했고, 시칠리아의 노토에서 그를 기념한다고 기록하며 그의 신분을 성인이 아닌 ‘복자’로 표기하였다.♣
|
|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
| 2 | [콘라도(2.19 ...] | 가톨릭 성인의 삶: 고백의 용기, 성 콘라도 | 주호식 | 2019/02/24 | 235 | 0 |
| 1 | [콘라도(2.19 ...] | 성 콘라드: 한번의 불장난, 은수자의 길로 | 주호식 | 2009/03/31 | 535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