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틸로는 610년경 독일 작센(Sachsen) 지방의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침략자들에게 납치되어 포로로 끌려간 후 로우 컨트리(Low Countries,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 지역)에 노예로 팔렸다. 그 당시 금속 세공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마르세유(Marseille) 조폐국의 책임자이자 클로타르 2세(Chlothar II, 584~629년 재위) 왕의 친구로서, 그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629~639년 재위)의 고문으로서 높은 지위와 막대한 부를 지닌 성 엘리지오(Eligius, 12월 1일)는 많은 노예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였다. 성 틸로 또한 그렇게 자유를 얻고 세례를 받은 후 성 엘리지오에게 금속 세공일을 배웠다. 632년에 성 엘리지오는 리모주 교구의 솔리냑에 성 베네딕토회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의 성 레마클로(Remaclus, 9월 3일)가 초대 수도원장으로서 운영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성 틸로를 솔리냑 수도원으로 보내 교육받도록 했고, 성 틸로는 그곳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어 64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641년에 성 엘리지오는 누아용-투르네(Noyon-Tournai) 교구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가 사목해야 할 교구는 대단히 넓은 지역으로 주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이교도들이었다. 성 엘리지오는 성 틸로를 불러 오늘날 네덜란드의 코르트리크(Kortrijk/Courtrai)와 벨기에의 투르네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였다. 그는 그 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고, 그곳 주민들로부터 그 지방의 사도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660년 스승인 성 엘리지오 주교가 선종한 후 솔리냑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짓고 그동안 소홀했던 기도와 엄격한 참회를 실천하며 지극히 단순한 삶을 살다가 702년경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벨기에와 프랑스 지역에서 널리 퍼졌고, 그 지역의 많은 성당이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월 7일 목록에 성 틸로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프랑스 리모주 근처 솔리냑에서 성 엘리지오의 제자이며 금속 공예가이자 수도승인 성 틸로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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