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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메나(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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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필로메나 (Philomena)
축일 8월 1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연대미상
같은이름 필루메나
성인 기본정보

   성녀 필로메나는 로마의 동정 순교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가 알려진 것은 1802년 5월 이탈리아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있는 프리스킬라(Priscilla) 카다콤바의 한 벽감 속에서 젊은 여성의 뼈가 발굴되면서부터이다. 그녀의 무덤을 닫기 위해 사용한 세 개의 석판(벽돌)에는 두 개의 닻, 세 개의 화살, 종려나무와 꽃이 그려져 있었고, “LUMENA PAXTE CUM FI”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석판들을 재배치하여 “Pax tecum Filumena”(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필루메나)라고 해석하며 초기 순교자인 성녀 필로메나의 유품임을 밝혀냈다. 무덤 안에는 성녀 필로메나의 유해와 함께 그녀의 피를 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유리병과 잔류물이 발견되었다.

   1805년에 성녀 필로메나의 유해는 나폴리(Napoli) 근처 놀라(Nola) 교구의 무냐노(Mugnano) 성당으로 전달되어 그곳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성녀 필로메나에 대한 지역 교회의 열정적 공경이 시작되었고, 그녀의 전구를 통한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녀에 대한 공경이 여러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1833년 나폴리 출신으로 도미니코회 제3회 수녀인 마리아 루이사 디 제수(Maria Luisa di Gesu)가 성녀 필로메나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사적 계시가 출판되면서 그녀에 대한 전기적 언급이 알려졌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그리스 서북부 코르푸섬(Corfu Is.) 왕의 딸로 어려서 개종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순결 서약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가 그녀의 아버지와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평화를 위해 황제를 만나러 로마에 갔다. 황제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아내가 되어주길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여러 방법으로 고문을 가했다. 채찍질하고 닻을 매달아 테베레강(Tevere R.)으로 던졌으나 천사들이 밧줄을 자르고 그녀를 강둑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화살을 쏘아 죽이려 했으나 그 또한 실패하자 목을 베었다고 한다.

   성녀 필로메나에 대한 공경이 여러 나라로 급속히 퍼져나간 데에는 또 다른 요인도 있었다. 그녀의 유물 중 일부가 이탈리아에서 온 몇몇 수도자들에 의해 프랑스로 옮겨졌고, 그중 일부가 아르스(Ars)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Baptistae Maria Vianney, 8월 4일) 신부의 절친한 친구의 가족인 17살의 복녀 폴린 마리 자리코(Pauline Marie Jaricot, 1월 9일)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심각한 신경 손상으로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1835년 8월 10일 성녀 필로메나의 전구를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성녀 필로메나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게 되었고, 아르스에 그녀를 기념하는 경당을 지어 공경하였다. 성 비안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아르스를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를 통해 성녀 필로메나에 대한 공경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성녀 필로메나의 무덤과 성지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1837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는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고 8월 11일에 기념하도록 했다. 하지만 옛 “로마 순교록”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가지는 않았다.

   성녀 필로메나 기념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문이 작성되어 사용되고, 그녀의 무덤에서 계속해서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무것도 없다는 비판적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20세기 초에 과학자들은 1802년에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발견된 뼈가 원래 매장된 뼈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제기했다. 그리고 석판의 잘못된 순서가 이미 4세기에 무덤을 만들 때 과거 다른 무덤을 장식했던 재료를 재사용한 관습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그래서 성녀 필로메나의 뼈를 발굴했다고 판단한 매장지가 실제 순교자의 매장지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필로메나라는 사람이나 문자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역사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1961년 2월 14일, 교황청 예부성성은 성녀 필로메나에 대한 공적인 공경을 금지하고 전례력에서 그녀의 축일을 삭제하였다. 하지만 성녀 필로메나에 대한 지역적 · 개인적 공경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성녀 필로메나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1년의 폐지 결정이 전례적 거행에 관한 것이지 성녀 필로메나의 성성(聖性)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 이미 여러 교황이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고 또 실제로 공경했음을 들어 지역 교회 차원에서의 공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필로메나는 백합 또는 닻을 지닌 동정녀 그리고 세 개의 화살을 지닌 동정녀로 그려진다. 때때로 종려와 채찍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녀 필로메나는 필루메나(Philumena)로도 불린다.♣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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