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홍금주 페르페투아는 서울 사대문 밖 어느 교우 집안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소 교리는 알았으나 교리의 근본은 잘 모르고 있었다. 15세에 외교인에게 출가한 것도 교리를 확실히 몰랐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그녀는 신앙이 냉담해져 외교인과 다름없이 지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자 그녀는 어리 자식 박(朴)호랑 하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교우 집을 돌아다니며 의탁하여 생계를 이어가다가, 의지하던 아들마저 잃게 된 후로는 미나릿골에 사는 최 필립보의 행랑에 방 한 칸을 얻어 들었다. 마침 주인이 열심한 교우인지라 교리문답을 다시 배운 후 성사를 받았다. 그녀는 열심히 묵상할 때와 첨례신공할 때면 언제나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여 신심을 더하게 되는 이들이 많았다. 유 바르바라(Barbara)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는 홍 페르페투아가 “내 소원은 붉은 옷을 입는 것이다”라는 말에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순교가 바로 나의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녀는 숨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에게 피신하도록 여러 번 권했으나 듣지 않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1839년 4월 하순경에 포졸들이 최 필립보의 집에 침입하여 그의 동생 야고보와 아내를 잡아갈 때 그녀도 함께 잡혀갔다. 홍금주는 배교를 거부하고 교우들을 대리는 명령을 듣지 않았으므로 주리를 틀렸다. 그러나 그녀는 신음도 하지 않고 이 혹형을 잘 견디었다. 그녀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인 듯하다. 포졸들이 저희들 멋대로 그녀를 특별한 옥으로 끌고 가서 옷을 벗겨 대들보에 매달라놓고 능욕하였으나, 그녀는 태연자약하여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끝내 굴복하지 않자 사흘이 지난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세 번이나 다리에 곤장을 맞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사형선고를 받고 옥으로 끌려가 집행될 때까지 갇혀 있었는데, 삼복더위가 겹쳐 4, 5차례나 열병을 앓아야 했다. 다행히 병에서 회복된 그녀는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주며 씻어 주기도 하고, 이도 잡아주는 등 온갖 시중을 들었다. 그녀의 이토록 깊은 사랑과 헌신 때문에 옥중의 교우들은 친누이처럼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 이윽고 6개월가량 옥에 있다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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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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