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Maria de Cervello)는 1230년 12월 1일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느 날 보통 ‘메르체다리오회’(Mercedarian 또는 Order of Mercy)라고 불리는 ‘노예 해방을 위한 속량의 성모회’(Order of the Blessed Virgin Mary of Mercy) 소속 베르나르도 데 코르베라(Bernardo de Corbera) 신부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 신부는 당시 에스파냐와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 의해 노예가 되거나 포로로 잡힌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속량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크게 감동한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녀는 결혼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고자 했다. 126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와 함께 5년 정도 머물다가 어머니마저 1265년에 선종하자 그녀는 바르셀로나의 메르체다리오회 수도원 인근에 있는 신심 깊은 여성들의 작은 공동체에 들어갔다. 이 여성 공동체는 베르나르도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기도와 선한 일을 실천하며 지냈다.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는 성녀 에울랄리아 병원(Hospital de Santa Eulalia)에서 일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 그리고 수감자와 포로로 잡힌 이들을 구하려는 메르체다리오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그녀는 메르체다리오회를 설립하고 1258년에 선종한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 1월 28일)와 함께하고 그 뜻을 이어받은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가 속한 여성 공동체를 중심으로 속량의 성모회 3회(Third Order of Our Lady of Ransom de Mercede)를 설립하는 승인을 받고 속량의 성모회 수도복을 입게 되었다. 그들은 서원하면서 기존의 복음삼덕 외에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추가했다.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는 동료 자매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어 무슬림에 의해 노예가 된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활동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돕는데 일생을 바쳤다. 이러한 헌신으로 인해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는 모국어인 카탈루냐 말로 ‘마리아 델 소코로’(Maria del Socorro/Socors)라고도 불리는데, ‘소코로’는 ‘도우미’라는 뜻으로 ‘도움의 마리아’로 불린 것이다.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는 1290년 9월 19일 바르셀로나의 수녀원에서 선종한 후 같은 도시에 있는 속량의 성모회 대성당(Basilica de la Merced)에 안치되었다. 생애 말년에 그녀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 많은 이들을 도와주었고, 사후에도 폭풍 속에서 곤경에 처한 선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 구해준 기적으로 인해 에스파냐에서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그녀는 수도복을 입고 백합과 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된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2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9일 목록에 그녀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에스파냐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속량의 성모회의 동정녀인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가 자신을 부르는 사람에게 늘 도움을 주었기에 일반적으로 ‘도움의 마리아’로 불린다고 기록하였다.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로는 성녀 에울랄리아(Eulalia, 2월 12일)와 함께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그녀는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리오네(Maria de Cervellione) 또는 성녀 마리아 데 세르벨론(Maria de Cervellon)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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