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팔쿠스(Falcus, 또는 팔코)는 10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Calabria)의 카탄차로(Catanzaro) 인근 타베르나(Taverna)에서 유서 깊은 포에리오(Poerio)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독과 은둔 생활에 매료되어 고향 근처 페시카의 산타 마리아(Santa Maria di Pesica) 수도원에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했다. 그 수도원은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바실리오 수도승들이 생활하면서 경건한 생활로 칼라브리아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복자 팔코는 이곳에서 힐라리온(Hilarion) 수도원장의 지도를 받으며 다른 여섯 명의 형제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아브루초(Abruzzo)에서 ‘일곱 명의 형제들’로 공경을 받았다. 977년에 사라센족이 칼라브리아 지역을 침략했을 때 그들은 수도원을 떠나 아브루초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프라타(Prata) 영주의 도움으로 오늘날 키에티(Chieti) 근처 프라타 요새에 새로운 수도원을 지었다. 그들은 이집트 수도승들의 정신에 따라 작은 움막을 짓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금욕과 단식을 실천했다. 힐라리온 수도원장이 죽고 일곱 형제들 중 막내인 그리스인 니콜라스(Nikolas)가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들은 로마(Roma)를 순례한 후 수도생활을 이어가다가 니콜라스가 세상을 떠난 후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복자 팔코는 로마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떠나 저녁 무렵 팔레나에 도착했을 때 기력이 떨어져 인근 마을에서 쉬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거룩한 수도승이 도착하자 악령이 들끓던 지역이 즉시 정화되고 그의 존재는 지역 주민들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 결국 복자 팔코는 그곳에 남아 산속에 머물며 엄격한 생활과 기도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사제직을 마다하고 평범한 수도승으로 살았다. 11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1월 13일 아침에 그의 은둔처에 있던 작은 종이 갑자기 기적적으로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은둔처에 갔다가 촛불 두 개가 켜진 탁자 위에서 숨진 그를 발견했다. 그의 시신은 산테지디오(Sant’Egidio) 수도원 성당에 묻혔는데, 악령 들린 한 사람이 그의 무덤 앞에서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그의 유해가 공개되었다. 그 뒤로 복자 팔코에 대한 공경은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끊임없는 습격과 강도로 인해 성인 유해에 대한 훼손과 파괴를 염려한 술모나(Sulmona)의 주교는 1383년에 그의 유해와 성상을 팔레나 중심부에 있는 산탄토니노(Sant’Antonino) 순교자 성당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복자 팔코는 팔레나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았고, 그가 안장된 성당은 오늘날 성 안토니노와 팔코(Santi Antonino e Falco) 성당으로 불리고 있다. 팔레나에서는 매년 1월 13일을 그가 선종한 날로 기념하고, 8월 15일 이후 주일에 그의 유해가 이장된 것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9일 목록에 복자 팔코 은수자가 칼라브리아의 팔레나에 있었다며 그의 이름을 추가 등록하였다. 지역 교회에서 오랫동안 성인으로 공경해오던 그가 ‘복자 팔코’로 등록된 것은 아마도 술모나와 팔레나의 기록 보관소가 화재로 소실되어 그의 시성과 관련된 기록들이 사라진 이유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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