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귀도(Guido)는 970년경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Ravenna) 근처 카사마리(Casamari)에서 부유한 스트람비아티(Strambiati)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족의 도움으로 법학, 건축학, 음악 등을 공부하며 안정적이고 편안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특별히 외모와 옷차림 등에 큰 관심을 두며 자랐는데, 우연히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고 좋은 옷을 벗어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족이 바라던 결혼 대신에 수도 생활을 선택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로마(Roma)로 순례를 가서 삭발례를 받고 다시 팔레스티나(Palestina) 성지로 떠났다. 순례를 마치고 라벤나로 돌아온 그는 포강(Po R.)의 조그마한 섬에 살던 은수자 공동체에 들어가 마르티누스(Martinus)라는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3년을 지냈다. 그 후 그는 페라라(Ferrara) 근처에 있는 폼포사 수도원에 들어가서 성 베네딕토회의 수도승이 되었다. 수도원 안에서 그의 뛰어난 성덕과 명성은 더욱 빛을 발했고, 그래서 998년에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성 귀도가 48년간 원장으로 헌신하는 동안 폼포사 수도원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늘어나는 수도승들을 위해 수도원 건물을 확장하고 성경과 전례 음악 등의 교육을 강화하며 수도원 생활 규칙을 개혁하였다. 그의 모범에 영감을 받은 아버지와 형도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 2월 21일)도 2년 동안 수도원에 머물며 수도승들을 가르쳤다. 그는 원장으로서 행정적 책임에도 불구하고 규칙적으로 페라라 인근의 은둔처로 가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노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라벤나 대주교의 박해를 받아 수도원이 파괴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겸손함과 확고한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했고, 노년에는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다시 은수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는 하인리히 3세(Henry III the Pious)의 초대를 받고 피아첸차(Piacenza)로 가던 중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파르마(Parma)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르고 산 돈니노(Borgo San Donnino, 고대 로마 시대에 군사 시설로 건설된 도시로 1927년 이후 피덴차[Fidenza]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에서 1046년 3월 31일 선종하였다. 당시 수도승들의 이상적인 모범으로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성 귀도의 시신은 그와 동행한 두 수도승에 의해 폼포사 수도원으로 옮겨 안장할 예정이었다. 그들이 파르마에 도착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성 귀도의 유해를 억지로 파르마 대성당에 모셨다. 하인리히 3세 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성 귀도의 유해를 베로나(Verona)의 산 제노 대성당(Basilica di San Zeno)으로 옮기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유해를 독일 남서부 슈파이어(Speyer)로 옮겨가 그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대리석 석관에 안치하여 1030년경 콘라트 2세(Konrad II) 황제가 건립한 성 요한(St. John the Baptist) 수도원 성당에 모셨다. 그 후에 수도원은 그의 이름을 따서 성 귀도 수도원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2000년에 그의 유해를 폼포사 수도원에 옮겨 모셨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1일 목록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파르마 근처 보르고 산 돈니노에서 선종한 성 귀도가 폼포사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서 많은 제자를 모으고 수도원 건물을 재건한 후 기도와 묵상, 거룩한 전례에 헌신하고 은둔처에서 오직 하느님께만 마음을 두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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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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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귀도(3.31)] | 성 귀도: 엄격한 수도생활에 전념 | 주호식 | 2011/12/18 | 257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