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페트루스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또는 베드로 가니시오)는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헨(Nijmegen)에서 아홉 차례나 시장으로 선출된 야곱 카니스(Jacob Kanis)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베드로 카니스로도 불리는 그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독일의 쾰른(Koln)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 회원이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네덜란드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산을 모두 나눠 준 후 1546년 25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1547년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여러 회의에 참석했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가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던 중 바이에른(Bayern)의 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의 도움을 요청하자 1549년에 잉골슈타트(Ingolstadt)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도 수행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는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신자들이 교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1555년 빈에 머무는 동안 그는 독일어권 신자들을 위해 독일어로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한 “그리스도교 교리대전”(Summa Doctrinae Christianae)을 집필했다. 그가 독일어 교리서의 첫판을 출판하자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즉시 15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1558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소 교리문답집”을 출판하였다. 그는 1556년에 프라하(Prague)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해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Bohemia)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강의와 설교를 계속하고, 프로테스탄트와 논쟁과 강연을 통해 많은 이들이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아오도록 했다. 또한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년부터 1568년 사이에 그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주교좌 대성당의 대표적인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으로 30년 동안 도보로 또는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후일 그는 독일의 딜링엔(Dillingen),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칼뱅파가 다수인 스위스의 프리부르(Fribourg)에서 선교사로서 끝까지 교육과 집필에 전념해 시민 대부분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고 1597년 12월 21일 그곳에서 교리서를 손에 들고 선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 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할 만큼, 트렌토 공의회에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당시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력을 간파했기 때문에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는 교리서뿐만 아니라 성인전, 성경 주석학, 호교론, 수덕 신학 분야에서도 저술 활동을 이어갔고, 교부 문헌에 관해서도 연구와 저술을 계속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재건에 힘쓴 그는 독일어권에서 보통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6월 5일)의 뒤를 잇는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186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며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1926년 로마 보편 전례력에 포함되면서 4월 27일을 전례적 기념일로 정했다. 그 뒤로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그가 선종한 날인 12월 21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일부 지역과 예수회에서는 예전과 같이 4월 27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21일 목록에서 예수회 신부이자 교회 박사인 성 베드로 가니시오가 독일로 파견되어 유명한 교리문답을 포함한 저서와 설교로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헌신하다가 스위스의 프리부르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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