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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 서짓골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갈매못 네 순교성인들이 묻혔던 거룩한 땅
지번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438-3 
전화번호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관련기관 만수리 공소(하부 내포 성지)    (041)836-9625
관련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로 243

갈매못에서 순교한 후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한 야외제대.1866년 병인박해의 피바람이 전국을 뒤덮었을 때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충청수영(忠淸水營)이 있던 보령의 갈마연, 지금의 갈매못 성지 해변에서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자신들의 붉은 피로 모래사장을 붉게 물들였다. 이 중에서 다블뤼 주교를 포함한 다섯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1866년 3월 7일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교구장직을 승계해 제5대 조선교구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4일 만인 11일 다블뤼 주교는 자신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대원군과의 접촉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자들이 마구 처형되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의 더 큰 희생을 막고자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하였고, 다른 선교사제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쓴 후 붙잡혔다.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이란 한자 구절을 새긴 순교자 현양비.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다블뤼 주교 일행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국혼(國婚)이 임박한 조정의 상황으로 인해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충청수영이 있는 보령 고을의 갈마연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중간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 요셉 회장도 동행하게 되었다. 병인년 3월 29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 처형장 근처에 도착하여 포졸들이 다음날 이웃 읍내를 돌며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짜자, 다블뤼 주교는 “내일 형장으로 곧바로 가거라.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고자 했던 경건한 열망과 위엄 있는 어조에 포졸들과 군사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섯 순교자들은 주님 수난에 동참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았고, 포졸들은 붉은 피가 흩뿌려진 모래밭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 순교자들의 목을 하나씩 장깃대에 꽂아 깃대를 똑바로 세워놓았고, 목이 잘려진 몸은 그대로 두어 세상 사람들이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3일 후인 1866년 4월 2일 수영의 지시에 따라 비신자들이 장깃대에서 순교자들의 머리를 내려 각각의 시신과 함께 인근 모래사장에 묻었다. 이곳이 갈매못 다섯 순교자들의 첫 번째 무덤이자 임시매장지였다. 이때 비신자들은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시신을 한 무덤으로, 조선인 2명의 시신을 또 한 무덤으로 만들고 그 위에 잔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목이 잘려진 부분의 일치 여부를 확인해 순교자들의 신원을 확실히 한 후 시신마다 안가(다블뤼 주교), 민가(위앵 신부), 오가(오메트르 신부), 황가, 장가라고 쓴 명패를 달았다. 1899-1900년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에 이와 관련된 증언들이 나온다.

황석두의 시신은 임시매장 직후 조카이자 양자인 황기원 안드레아와 그 아우인 황천일 요한 등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2리)에 안장했다가 1982년 8월 25일 고향 인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고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갈매못에 다블뤼 주교, 위앵 ·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시신만 남게 되자,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이 다른 곳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청양 다락골 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시신 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발각될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야외제대 정면에는 주차장을 겸한 광장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장노첨은 다시 남포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일명 이사심) 바오로를 찾아갔고 그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박해시대 교우촌 사이에 연락체계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1866년 5월 21일 갈매못 임시매장지에서 순교자들의 목과 시신을 일치시키고 염을 한 뒤 10리가량 떨어진 오포리의 야산(일설에 콩밭)에 암장하였다. 이것이 갈매못 순교자들의 두 번째 무덤이며 하나의 봉분을 쌓아 만들었다. 이 무덤은 이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우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첫 번째 이장을 주도했던 이화만이 1866년 6월 직접 무덤 상태를 확인하고 홍산 도앙골(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교우촌에 살던 김순장 요한 금구와 두 번째 시신 수습 및 이장을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장 비용을 신자들에게 추렴하고 이장 장소는 남포 서짓골 이씨 집 뒤편 골짜기 담배 밭으로 결정했다. 신자들은 비신자 최가의 배를 삯 내고 역시 비신자인 서성학 형제를 사공으로 고용했다. 이장은 1866년 7월(음력)에 이뤄져 서짓골에 안장되기까지 10-15일이 소요되었다. 갈매못 인근 두 번째 무덤에서 서짓골 세 번째 무덤까지의 이동 경로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은 다음과 같이 고증했다. 여수애(현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의 여수해) → 가패 → 슬섬(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의 솔섬) → 녹안이뿌리(현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 독대섬) → 완장내(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 곰재(현 보령시 주산면 동오리) → 서짓골.

야외제대 뒤편에 마련한 파고라 안돈정. 다블뤼 주교의 한국식 이름인 안돈이에서 따온 이름이다.서짓골의 세 번째 무덤은 1866년 7월 25일(음력)부터 1882년 1월까지 15년 6개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결과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땅이 되었다. 이후 순교자들의 유해는 1882년 11월 6일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내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보내졌다가 1894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치되었다. 6년 뒤인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1968년 10월 6일)을 1년 앞둔 1967년(정확한 일자에 대한 기록이 없음)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네 순교성인들의 시신 이동에 앞장섰던 이화만과 그 아들들은 그 해 가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병인년 12월 12일 ‘무참히 맞아 죽어 시신이 버려졌다’는 간단한 기록과 구전만 전해질 뿐 시신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이사심의 증손인 이우철 시몬(1915-1984년) 신부는 이사심의 부인인 정 마리아의 묘(부여군 충화면 천당리 소재) 묘비를 직접 써 이사심 삼부자의 순교 내력과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경위를 기록했다. 또한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홍산 삽티에 안장해드린 조카들 역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 제3대 주임인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며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고, 2012년 1월 대전교구에서 하부내포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며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교회의 조명을 받게 되었다. 윤종관 신부는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루카 소장 등과 함께 위치 고증과 학술적 연구 성과를 축적하면서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성지 전경. 주차장 겸 광장 너머로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가 보인다.

그 결과 2013년 10월 31일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현지 순교사적지에서 대전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서짓골 성지는 같은 해 5월 미산면 평라리 일대 886㎡(268평) 크기 시유지에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부지를 정비하고 화장실과 파고라(정자), 주차장 등 기반을 조성한 후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성지 안내 비석, 성역 표지 시설공사를 마치고 이날 봉헌식을 가졌다. 무게가 50톤이나 되는 제대석은 오석을 3.6×1.7×1.35m 크기로 잘라 만들었으며,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이름을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좌대 포함 8m 높이의 순교자 현양비에는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이란 한자 구절을 새겼다.

야외제대 쪽에서 바라본 모습. 정면에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고,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호수가 보령호이다.

이로써 서짓골 성지는 2010년 11월 13일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와 2011년 9월 29일 충남 부여군 내산면 옛 교우촌 도앙골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 축복에 이어 하부내포 성지에서 세 번째로 봉헌된 성지가 되었다. 그 외에 하부내포 성지로는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지였던 삽티(부여군 홍산면),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 최초 사목지이자 황석두 성인 거주지였던 내대(부여군 외산면), 프티니콜라 신부 피란지였던 고갈(부여군 외산면) 등이 있다. 2014년 8월에는 보령시의 협조로 갈매못 순교성지에서 완장포구를 거쳐 서짓골 성지까지 차량과 도보를 이용한 성지순례길을 조성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2013년 평화신문 오세택 기자 & 가톨릭신문 박지순 기자의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2월 2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 위앵 신부, 황석두 · 장주기 회장이 순교한 후 황석두 성인의 유해는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고, 나머지 네 성인의 유해는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 바오로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용감한 도앙골 교우촌 신자들의 도움으로 처형장에서 오포리 야산의 두 번째 무덤을 거쳐 그해 여름 배편을 이용해 서짓골의 담배 밭에 이장하여 모셨습니다. 네 순교성인의 유해는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1900년 명동 성당 지하묘역을 거쳐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었습니다. 서짓골 성지는 15년 6개월 동안 네 순교성인이 머문 세 번째 무덤으로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순교사적지입니다.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의 고 정규량 레오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자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 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12년 1월 대전교구에서 하부 내포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고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성역화가 이루어져 2013년 10월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보령호 옆 도로변에 조성된 성지에는 네 순교성인의 무덤을 형상화한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정자와 편의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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